불교에서 본(水)의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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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본 물의 예찬론
불교에서는 진리를 법(法)이라고 한다. 우주의 진리를 불법(佛法)이라고 한다. 불법은 걸림 없는 원융(圓融)무애(無碍)를 말한다. 물처럼 걸림 없이 도도히 흘러감을 뜻하는 것이다. 부처님도 진리를 설하실 때 물을 많이 인용 하고 계신다. 만법(萬法)을 바닷물과 파도에 비유하셨다. 중생과 부처(佛), 보리(菩提)와 번뇌(煩惱),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을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동등한 것으로 중생이 곧 부처이며 번뇌가 곧 보리이며 생사가 곧 열반이여서 만유(萬有)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것으로 설하고 있다. 중생들이 부단히 일어나는 번뇌 망상을 파도에 비유하고 부처의 보리를 물에 비유한 것이다. 번뇌가 사라진 깨달음의 경지를 해인삼매(海印三昧)라 하여 최고의 경지로 설하고 계신다. 중생들은 업에 떠밀려서 태어나는 업보(業報)중생이라고 한다. 수행(修行)이란? 행위 즉 업을 닦는 것을 말한다. 수도(修道)란 도를 닦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수도에는 도를 씻는다는 의미도 있다. 수행에는 행위를 닦는 다른 행위가 따르지만은 깨달음을 지향(指向)하는 수도에는 행위가 따르지 않고 공(空)만이 존재한다. 물에는 자성(自性)이 없다. 인연(因緣)따라 변화한다. 때론 얼기도 하고 때론 수증기로 증발하기도 한다. 네모 그릇에 담으면 네모가 되기도 하고 삼각 그릇에는 삼각형이 원통(圓筒)에 담으면 원통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불법(佛法)을 물로 나타내신 것이다. 물의 방울은 둥글다. 이를 지혜(智慧)라고 한다.
물은 보시(布施)를 베풀 줄 안다. 물은 베풂의 근원(根源)이다. 웅덩이를 만나면 가득 채워주고 넘쳐야만 흘러가는 여유를 보이기도 한다. 우주의 70~80%가 물로 형성되어 있다. 지구의 70~80%가 물로 채워져 있다. 사람의 인체도 70~80%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의 탄생은 물로서 시작된다. 사람은 물 없이는 하루도 못산다. 사람뿐만 아니라 우주의 유정(有情)무정(無情)일체중생도 물 없이는 생명을 유지하지 못한다. 중생의 생명유지와 물의 보시는 절대 불가분의 관계이다.
지계(持戒)를 상징한다. 물은 질서를 지켜나간다. 타의가 아닌 스스로 분수를 알고 질서를 따르는 것이다. 이를 지계라고 한다. 법(法)과 계(戒)는 다르다. 법은 사회질서를 위하여 강제(强制)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집행력과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의 계율은 타의(他意)에 의한 강압이나 구속력이 없다. 제자신이 스스로 받고 스스로 지켜나가는 것이다. 물은 빨리 달려가기도 하고 천천히 늦게 가기도 한다. 지계의 상징인 물은 끼어들기를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줄도 모른다. 물은 분수(分數)를 안다. 높은 곳을 향하여가 아니라 낮은 곳을 찾아서 흘러간다. 높은 곳을 항한 허영심이 아니라 낮은 곳을 찾아서 흘러간다. 물은 거슬러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간다. 법에 순응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조고각하(照顧脚下)이다.
물은 인욕(忍辱)을 할 줄 안다. 물은 자존심을 내 세우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강한 자존감을 유지하고 있다. 물은 무서운 성질을 가지고 있다. 물이 화(禍)가나면 무섭다. 오죽했으면 ‘화가 나면 물불을 안 가린다.’ 라는 말이 있을까? 물은 불보다 무서운 것이 물이다. 그런 물이 장애물을 만나면 멈추기도 하고 때론 양보하기도 한다. 또한 돌아갈 줄 안다.
물은 정진(精進)의 상징이다. 물은 멈춤 없이 계속 흘러간다. 봄여름 가을 겨울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흐른다. 계절의 변화를 다 수용하면서 본질의 변함없이 끝없이 이어서 계속 흐른다.
물은 선정(禪定)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은 씻는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물은 닦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물을 씻고 닦으려면 물 없이는 안 된다. 물은 물로 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은 물로 닦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물은 자신만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다. 이를 물의 자정능력(自淨能力)이라고 한다.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든다. 청정(淸淨)계곡 1급수도 오염된 하천의 2~3급수도 바다로 모여든다. 축산농가의 오염수도 심지어는 정화조(淨化槽)의 오염된 물도 바다로 흘러든다. ‘바다’라는 낱말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왜 바다일까? 청정수(淸淨水) 오염된 물(汚染水) 변화된 물(變化水)등 모든 물들을 다 받아준다. 그래서 바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 바다도 생명이 살아있는 것은 다 받아들여도 생명이 없는 죽은 생명체는 안 받아 들인다. 이것이 물의 청정성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바닷물에서 태생되었다. 과학자들은 동물의 혈액이 짠맛인 것을 그이유로 설명하고 있다. 바닷물에서 최초로 생겨난 아메바가 분화(分化)되고 진화(進化)되어 왔다는 것이다. 바다는 모든 생명체의 고향이다. 바다는 우리의 고향이다. 살아있는 생자(生者)의 고향이다. 죽은 사자(死者)의 고향은 바다가 아닌 육지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체는 받아들이고 죽은 생명체는 사자의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바다는 육신은 밀어내고 영혼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설법에는 바닷물에 대한 비유가 유난이도 많다. 물과 보살의 삶이 닮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살이 수행해야하는 6바라밀이 물속에 다 녹아 들어있다. 그래서 붓다(佛)는 진리(法)이고 법은 물(水)이다.
기록상 부처님후세 철학자인 노자(老子)선생께서도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에서 물을 예찬했다. ①막히면 돌아가는 지혜(智慧), ②구정물도 받아주는 ③포용력(包容力), ④어떤 그릇에나 담기는 융통성(融通性), ⑤바위도 뚫는 끈기와 인내(忍耐), ⑥장엄한 폭포처럼 투신하는 용기(勇氣), ⑦유유히 흘러 바다를 이루는 대의(大義)가 물에서 배워야 할 덕목이라고 강조하고 계신다.
나무일체청정 대해중보살마하살(南無一切淸淨 大海衆菩薩摩訶薩)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願共法界諸衆生 自他一時成佛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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