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의승 중중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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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의승 중존존
이욕존(離欲存) 이 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물처럼 바람처럼 말없이 마음 편히 살아가는 것이 승(僧)이다.
중 승(僧)은 인(人)변에 일찍 증(曾)을 합한 것으로 중(스님)
또는 마음이 편한 모습의 사람을 뜻한다.
승(僧) 일찍이 깨달아 마음이 편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일찍이 깨달아 마음이 편 한사람이 중(僧)이다.
중(스님)들은 중생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일찍이 깨달고 출가한 분들이다.
화엄경 약찬 게에서 초발심시 변정각 이라고 했다.
발심한 그때가 바로 정각을 이룬 마음이 편안한 때라는 것이다,
사바세계의 번뇌고통을 일찍이 알아차리고,
출가한 그때부터 마음이 편한 사람 중(스님) 이라는 것이다.
일찍이 깨달아 마음이 편한 사람 대표적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나는 초등하교 시절 위인전을 읽고 독후감을 발표하는 시간에
석가모니 부처님전기를 선택하여 읽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부처님과의 인연이 깊었던 모양이다.
나는 독후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거지왕초 거지대장으로 표현하여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혼쭐이 나도록 체벌을 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철들어 만나본 우리 담임선생님은
신심(信心)이 아주 돈독(敦篤)한 불자(佛子)였다.
어려서 혼쭐을 당했건만 나는 지금도 그 표현에는 큰 변함이 없다.
사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안타깝게도 거지다.
그것도 10대 왕초를 비롯한 1250명의 부하를 거느린 거지 대장이다.
그보다도 더 많은 수억 수십억의 부하를 거느린 거지 대장이다.
비천(卑賤)한 환경에서 태어난 예수님 공자님과는 달리,
석가모니 부처님은 카필라국의 왕위(王位)계승 0순위의 왕태자로 태어났다. 온갖 영화와 명예와 권력을 내팽개치고 스스로 고행을 선택하신
세속인의 눈에는 바보로 보이는 상상(想像)도 못할 일을 감행하신분이다.
이때부터 부처님은 중(僧)이다.
비록 영화(榮華), 명예(名譽), 권력의 왕관을 내팽개쳤지만
그의 마음은 편안함을 아는 중僧)이 된 것이다.
피나는 각고의 7년 고행(苦行) 중에도 육체적 고통은 따라는지 몰라도,
정각(正覺)을 향한 부처님의 마음은 정각(正覺)일념(一念)에
오히려 편안(便安) 하였을 것이다.
그 편안한 마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무상정등각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성취한 부처님은 그 후 일평생(一平生)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한일이 없다.
농사는 물론이요, 밥도 지어 본 일이 없고, 옷도 마련해 본적이 없다.
오직 남을 위하여 살아가신 것이다.
부처님은 공양도 일일(一日) 일식(一食)을 했다.
한평생에 옷 한 벌 마련하지 않았고,
남의 옷을 주워서 깁고 기워 누더기 옷을 입었다.
공양도 하루에 한 끼밖에 못하시고 거지 중에 상거지이다.
요즘에도 그런 거지는 없다.
그런데도 부처님은 무엇이 좋은지 항상 웃고 계신다.
부처님의 미소는 자비(慈悲)화안(和顔)의 미소(微笑)다.
항상 웃고 있는 부처님은 부처님 자신뿐만 아니라
보는 중생 모두에게 편안함을 준다.
나는 초등하교 때나 지금이나 부처님을 거지로 보는데 는
큰 변화가 없다고 말하지만 생각에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내가 어릴 때 위인전에서 본 거지는 경계와 멸시의 대상으로 본
경멸(輕蔑)걸인(乞人)거지였다.
그러나 지금 나의 부처님 거지는 경멸(輕蔑)걸인(乞人) 거지가 아니라,
내가 받들어 공경(恭敬)하고 따르고자 하는 거지(巨智)이다.
내가 동경(憧憬)하고 가고자하는 길의 안내자 걸인(傑人)거지(巨智)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내가 최고로 숭상(崇尙)하는 나의 길잡이 등불이다.
인류역사(人類歷史)최고의 걸인(傑人) 위없는 깨달음을 깨우친 삼계(三界)
도사(道士),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 거지(巨智)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깨우쳐 편안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승가(僧家)라고 한다.
승가의 생명은 나보다 남을 우선하는데 있다.
나는 2003년 여름 설악산 봉정암 으로 성지순례를 갔었다.
이미 두 차례 다녀온 길이라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이번 순례 길은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순례였다.
숙박지(宿泊地) 오세암을 출발하여 봉정암을 오르는 중간 중간에
많은 순례자를 만날 수가 있었다.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차림들 가지각색의 도반들이 함께 오르고 있었다.
그중 남녀(男女)혼성(混成)의 도반(道伴)들을 만났다.
삼삼오오(三三五五) 짝을 지은 도반들은 모처럼의 나들이인지
몹시도 즐거워했다. 험한 산길이라 위험한데도
서로가 신체 접촉의 장난도 치고 또 고성(高聲)으로 소리도 질려댔다.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는데 이번에는 장난과 함께 입에 담지도 못할
음담패설(淫談悖說)을 주고받으며 깔깔거리며 길을 간다.
참다가 나는 그들에게 웃음으로 한마디 말했다.
처사님 보살님들! 이런 상서(祥瑞)로 운 곳에 가시면서
그런 말씀들 하시면 됩니까?
모처럼 힘들여 가시는데 좀 좋은 법담(法談)들을 나누시지요.
대답이 걸작(傑作)이었다.
처사님 처사님은 그런 짓 안 해요. 그것이 뭐가 어때서 그래요?
그래놓고 일행은 또 까르르 숨넘어가는 소리로 웃는다.
무안(無顔)해서 나는 다음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발길만 재촉하는데
그래도 일행 중에 좀 낳은 사람이 있는지 “처사님 이해하세요,
산행이 하도 힘들어서 이리라도 하고 올라가면 좀 수월할 것 같아서
그럽니다. 죄송합니다.
약간의 위안(慰安)을 받은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랴 중생들인 것을!
오세암에서 봉정암 중간 지점에 제법 큰 냇물이 있다.
기도, 순례 객들을 위하여 차도 우려 팔기도 하는 중간 휴식처이기도하다.
그날따라 여름이라 몇 일전에 비가 많이 내린 관계로 냇물이 불어나
등산화를 벗고 건너야 할 형편이다.
등산화를 벗고 건넌 우리도반들은 다음 사람들을 위하여
돌을 모아 징검다리를 놓아주었다.
많은 기도, 순례 객들이 편안히 건너는 모습에 보람을 느껴다.
그중에 나이 많은 노(老) 보살(菩薩)님 일행을 만났다.
나이 들어 보이는 한 노 보살님께 연세를 여쭈니 82세란다.
놀랍다 저 연세에 산을 오르다니?
일행모두가 칠팔십 대의 노 보살님들이다.
대충 쳐다봐도 허리가 다 굽어있다.
그 굽은 허리위에 봉정암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이라고
미역, 쌀, 오이 등을 나름대로 잔뜩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을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어서니 돌인들 무거울까?
늙기도 설하거든 짐조차 지실까? “
내짐만 없다면 받아서 내가 대신 져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노 보살님들의 보따리 짐들을 가만히 챙겨보니
보살님들의 짐 보따리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사연을 알아보니 소속 사찰공양물을 나누어 전달하는 것이란다.
혼자 몸도 힘들 것 같은 노 보살들이 험한 산길을
힘에 겨운 공양물을 등에 잔뜩 짊어지고 오르는 것이다.
팥죽 같은 땀을 비 오듯 솟아내며 위험한 산길을 부처님 친견하겠다고
오르는 것이다.
“나무관세음보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위대한 가피력이로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합장을 하면 노 보살님들의 성불을 진심 축원했다.
냇물을 건넌 노 보살님들이 잠시 휴식을 하고 있을 때
아주 잘생긴 스님 한분이 냇물을 건너왔다.
한 여름 험한 고산(高山)길임에도 스님은 꾸김없는 모시 장삼을
수(입고)하고 계셨다.
정말로 옥골(玉骨)선풍(仙風)의 잘 생기고. 잘 챙겨 입은 스님이었다.
잘생긴 스님은 쉬고 있는 노 보살님들을 향하여
“보살들 짐들 잘 챙겨,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이야.
땅에 내려놓으면 안 돼, 그대로 짊어지고 있거나 안고들 있어“
대뜸 반말이다.
아마도 스님의 어머니뻘은 더 될 것 같고,
할머니뻘은 될 것 같은데 마구 호통이다.
기가 막히는 것은 제작질 하다가 꾸중 듣는 어린아이들처럼
노 보살님들은 얼른 짐 보따리를 들쳐 업고 출발을 서두른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젊디젊은 스님은 맨몸 맨손이다.
칠십 팔십대의 노 보살님들이 사찰에서 마련한 무거운 공양물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짊어지고, 힘겹게 오르는데
30대 스님은 모시장삼 수하시고 빈손으로 오르시며
잠시 쉬고 있는 보살님들을 꾸중하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뻘도 더 되는 노 보살님들에게 반말 아니, 천(賤)말을 하는 것이다.
이 글의 주제(主題)인 귀의승(歸依僧) 중중존(衆中尊)이 아니라
귀의승(歸依僧) 독존존(獨存尊)이다.
귀의승(歸依僧)중중존(衆中尊)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나를 위한 삶보다는 남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편안함을 일찍이 깨달고
실천하는 집단에 귀의한다는 말인데
아마도 이 젊은 스님은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
만을 알고 따르는 것 같아 마음이 안타까웠다.
물론 스님들을 존경하지만은 마음이 불편했다.
불편한 심기를 이끌고 한참을 올라가니
봉정암 8부 능선 소위 깔딱 고개를 앞둔 지점에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봉정암 염불소리가 여기 까지 들리는가?
귀를 의심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니 허름한 장삼을 수(입으신)하신
노스님이 목탁 치며 ‘석가모니불“ 정근을 열심히 하시면서
앞서가는 보살님들을 격려하고 보살피며 산을 오르고 계시었다.
헤어져 깁은 뜻한 철지난 장삼은 땀으로 흠뻑 졌어 금방이라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데, 다리를 휘감을 것 같은데,
노스님은 아랑곳 하지 않고 연신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이시다.
땀과 흙으로 뒤범벅이 된 스님의 흰색 고무신은 연방이라도
미끄러져 벗겨질 것만 같은데 용케도 벗터낸다.
이것이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부처님의 영험한 가피력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앞서가는 불자님들의 신발들이 등산하기에는
신통찮은 고무신이 많다. 옷차림도 신통찮다.
형편이 어려운 시골 사찰에서 큰 마음먹고 나선 기도, 순례의 길인 것 같다. 그래도 눈매가 살아있다.
비록 오랜 햇볕에 그을린 새 깜은 얼굴이라도 얼굴빛이 살아있다.
부실하기 짝이 없는 등산장비 이건만, 거침없이 부지런히 오른다.
부처님의 가피력 때문이리라.
어떤 것이 편안한 것임을 일찍이 깨달은 부처님의 제자
저 노스님의 원력(願力) 때문이리라.
이것이 귀의승(歸依僧) 중중존(衆中尊)이다.
자신보다는 타인의 행복을 우선 생각하는 삶.
타인의 편안함이 자신의 편안함으로 살아가는 집단에 우리는 머리 숙여
귀의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
원하옵건대 부처님의 진실한 마음은 무엇입니까?
정(淨) 법계진언(法界眞言):
옴 남, 옴 남, 옴 남, 옴 남, 옴 남, 옴 남, 옴 남...................
쉽게 생각하자 오 남, 오 남, 오 남,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호신진언(護身眞言): 옴 치림, 옴 치림. 옴 치림, ..................
이것도 쉽게 생각하자 움 치림, 움 추림, 움 추림 움 추리는 것?
바로 이것이다,
나를 낮추고, 나를 움츠리는 것,
이것이 나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나를 움츠리고, 항상 오! 남을 배려하는 마음,
이것이 법계를 깨끗하게 밝혀 불국정토를 만드는 길이다.
“아무리 경전을 많이 외울지라도.
이를 실천하지 아노는 방종한 사람은
남의 소만 세고 있는 목동일 뿐
참된 수행자의 대열에 들 수 없다.
아무리 사랑스럽고 빛이 고울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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