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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립다 보고 싶다. 미천당 목정배스승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지 어연 3주기가 다 되어간다. 박사님께 귀의하여 재가불교에 매진해 해온지도 19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동안 박사님의 우리들의 정신적 지주이시였다. 오늘날 혼탁한 불교계를 지켜보면서 박사님께서 생전에 외쳐 오시든 한국불교계의 청정계율이 그립고 보고 싶다. 2017년 10월 9일 한글날 국무회의에서 박사님께서 1975년 주창하신 “부처님오신날”이 42년 만에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한국불교계의 아쉬움 속에서도 늦게나마 환영할만한 경사이다. 그러나 박사님을 모시고 박사님의 필생의 서원인 재가불교정착화에 참여하는 대한불교법사회 재가불자들은 박사님 생전에 이러한 영광을 성취하지 못한 것에 만시지탄의 회한이 교차한다. 박사님 생전에 출간한 책 한권을 박사님 영전에 올려본다. 그리고 박사님과 오늘의 이 영광을 함께 축하하고자 한다. 박사님 그립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미천 목정배박사 불적기(佛迹記)
“명년 초파일 까지는 완공 되어야합니다”
불교방송에서 대형불사를 광고하는 내용이다.
꼭 해야만 했든 만시지탄(晩時之歎)의 불사(佛事)인지라서 나 웅봉법사도 능엄정사 매월법회시마다 동참을 강력 호소했다.
그런데 광고 어휘(語彙)가 뭔가 어색해 보인다.
광고하시는 큰스님께 송구스럽게도 귀에 좀 언짢게 들렸다.
꼭 초파일이라고 표현해야만 했을까? 초파일이라는 어휘는 숭유(崇儒)배불(排佛)의 조선유생들이 뭔가? 석가모니부처님의 탄생일(誕生日)을 얕잡아 보고 저속하게 표현하는 어휘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왈칵 엄습(掩襲)해 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탄생일을 스무닷새일로 표현하지는 안는다. 크리스마스 혹은 성탄절(聖誕節)로 표현한다.
공자님의 탄생일은 음력 8월 27일인데 스무이레로 표현하지 않는다.
“공부자(孔夫子) 탄강일(誕降日)”로 표현한다.
단군할아버지의 탄생일은 여러 학설이 존재하나 음력 10월 3일인데 초사흘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개천절(開天節)이라고 표현한다.
유독 부처님 탄생일만 속상하게도 초파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계에서도 초파일이 아닌 불탄절(佛誕節)혹은 석탄절(釋誕節)로 고쳐서 불러왔든 것이다. 사실은 알고 보면 이러한 표현들도 달력을 제작하는 인쇄업자들이 불교계에 자문을 구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단다. 그래서 3~4종류가 넘는 중구난방 식으로 표현된 것이란다.
초파일은 부처님의 탄생일이 4월 초(初)팔일(八日)임에 기인한다.
한국불교 조선조 유생들의 불교탄압에서 스스로 벗어나지는 못했다.
일제가 조선은 강제 합병함으로 자연스레 배불정책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일제는 불교를 조선통치의 한축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불교를 통하여 조선민족의 민족혼(魂)을 말살하려고 계획한 것이다.
소위 왜색불교(倭色佛敎)가 그 실체들이다.
승려가 결혼을 하는 등 우리의 전통불교가 깡그리 무너졌다.
그리고 외세(外勢)에 의해 조국과 함께 불교계도 해방을 맞이했다.
이번에는 기독교세력에 의해 불교계가 정화(淨化)되기 시작했다.
불교정화를 강력 추진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미국서 공부한 기독교 장로였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사는 특히 대처승(帶妻僧)불교로 상징되는 왜색불교를 저주했고 척결의 대상으로 했다.
이때부터 대처승과 비구승(比丘僧)의 피 튀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5.16을 통하여 집권한 권력자 박정희정권의 비구승(比丘僧)불교 지지로 가까스로 오늘날의 불교계의 질서가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불교계는 제대로 해방다운 해방을 이루지 못했다.
그 결과 아직도 불법(佛法)아닌 불법(不法)들이 난무한다.
그러니 언제? 제대로 된 조직을 추스르고 정비했겠는가?
아직도 한국불교는 일제의 사찰관리법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하기야 해방 후 세계불교도대회에서 확정한 불기(佛紀)마저도 세계 표준보다 1년이 앞서간단다. 누구가의 순간적 착각에 위한 실수란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수는 바로 잡아야 된다.
실수를 알면서도 못 고치는 것이 안타깝고 한심한 것이다.
다른 불교국가보다 우리불기가 1년을 앞서가는 부끄러운 현실이다.
불교계의 선지식님들의 아니 지도자님들의 적극적 의식이 아쉽다.
“부처님 오신 날” 얼마나 멋있고 알기 쉬운 아름다운 표현이 있다.
탁! 한번만 들어도 뇌리에 팍 팍 꽂힌다. 환희심이 절로 생긴다.
한국불교 최고의 선지식 미천 목정배 박사님의 작품이다.
부처님의 탄생일의 명칭마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여 우왕좌왕할 때 박사님이 선뜩 선택한 이름이란다. 그리고 그 이름이 빛을 발(發)했다.
슬기롭고 아름답고 쉽고 활기(活氣)가 살아 넘치는 이름 인지라 당장에 호기(好期)를 맞이했다. 부처님 오신날 이 이름의 기운으로 불교계의 오랜 숙원(宿願)이 해결되는 호기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좋은 이름은 좋은 기(氣)를 발한다. 만사형통의 기를 발하는 것이다.
당시 재가불자 용태영변호사의 오랜 투쟁으로 1975년 1월15일 부처님 오신날이 법정공휴일로 국무회의를 통과함으로 정착된 이름이다.
기록에 의하면 용태영변호사는 당시 총무처장관을 상대로 법정투쟁을 전개했단다. 물론 재판비용은 개인사비(私費)로 충당(充當)했단다.
당시는 경제대국건설을 앞세운 유신독재 시절이다.
누가 감히 경제대국건설에 저해(沮害)가 되는 공휴일을 하나 더 만들자고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벌이겠는가?
용태영변호사의 4월8일 부처님탄생일의 공휴권(公休權)주장은 이유 없다고 서울고법(高法)에서 기각(棄却)당하고 말았다.
그때 그 시절은 법원마저도 유신정부의 눈치를 살피든 시대였다.
그러나 용태영변호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대법원에 상고(上告)를 했다.
대법원에서 계류(繫留)중에 정부가 공휴일로 공포한 것이다.
재가불자 법률전문가의 전문성을 이용한 재가불자의 승리인 것이다.
부처님을 향한 재가불자의 강한 신심은 서슬 퍼런 유신독재정권마저도 두렵지 않았든 것이다. 부처님을 향한 신심은 그렇다.
미천 박사님의 신심(信心) 또한 유별나다.
박사님은 부처님을 위한 일이라면 생사(生死)를 초월한다.
불자(佛子)인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인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대장경판(수다라)전의 허술함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대장경판전 신축을 지시했다.
기존 대장경판전이 목조인지라 도난과 화재 방습(防濕) 방충(防蟲)등이 염려가 되고 신경이 쓰였든 모양이다.
당시 해인사의 대중스님들은 반대를 했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논리적인 반대를 제대로 전개하지는 못했다고 전한다.
물론 재가 전문가들도 반대이론을 펼치지 못했다고 전한다.
1975년 유신독재정권은 정부시책에 반론을 허용하지 않았다.
잘못했다가 찍히면 자기일신뿐만 가정과 직장이 작살나는 무서운 보복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인지라 모두가 숨죽이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 살벌한 상항에서 한분의 재가불자가 분연히 일어섰다.
부처님을 향한 일구월심(一句月深)신심이 목숨을 담보로 유신정권에 반론을 제기하고 담대(膽大간 큰)한 걸기(傑氣)를 감행케 한 것이다.
과연 누가 목숨을 걸고 그런 대담한 걸기를 감행했겠는가?
바로 미천 목정배 박사님이시다. 박사님은 해박한 지혜로 논리 정연한 공개반론을 언론을 통해 유신정권에 제기했든 것이다.
해인사의 가람배치는 일주문부터 대적광전(大寂光殿: 진리의 부처님 비로자나불을 모신법당) 대장경판(수다라 :팔만대장경을 모신 법보)전이 일직선으로 되어있어 일주문에서 동시에 참배가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대장경판전을 다른 곳에 신축이전하면 법보사찰 해인사 가람배치에 심각한 변형을 가져와 법보 사찰로서의 기능을 심대한 훼손이 불가피하다는 논리의 반론을 언론지상에 보도한 것이다.
불교 교리적 논리와 신앙논리로 보면 해박하고 지당한 반론이다.
그러나 박사님의 반론제기의 목적은 다른 곳에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아무리 최신공법을 제다 동원해도 지금의 대장경판전의 과학성 실용성 우수성을 능가한 건축물을 건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전문 학자들도 다들 잘 아는 상식인데도 최고 권력자 박정희대통령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여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어다는 것이다. 박사님의 불교교리와 신앙논리를 바탕으로 한 반론은 주효했었다.
그리고 맞아 떨어졌다. 박사님의 반론에 유신정권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염려 속에 교리와 신앙을 내세운 반론을 수용했다. 그래서 1975년 공중습도 조절시설 등 최신장비를 갖춘 새 대장경판전(殿)을 신축하고도 일부만 옮겼다고 한다.
그런데 실내에 응축수가 생기면서 경판이 갈라지고 비틀어졌다.
8백년을 아무런 문제없든 경판에 결함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경판을 옛 건물로 서둘러 옮겨 왔다는 것이다.
아찔한 순간이다. 만일 그때 박사님의 반론이 없었다면 정부는 경판을 모두 옮겼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를 훼손당했을 것이다.
이 또한 재가불자 미천 목정배박사님의 위대한 승리의 쾌거인 것이다.
이 쾌거는 6.25전쟁 당시 미군이 공비토벌을 목적으로 지시한 해인사폭격을 거부함으로 전란으로부터 해인사와 대장경을 지켜난 우리공군 김영환 장군의 위대한 공적과도 버금가는 훌륭한 쾌거인 것이다.
김영환 장군 또한 재가 불자이시다.
그리고 전시(戰時) 상부의 명령불복종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까지 받을 수 있는 위험을 안고 감행된 의연한 쾌거인 것이다.
이로 인해 실제로 장군은 사형은 아니라도 피해를 입기는 했다.
미천 목정배 박사! 만세! 우리공군의 김영환 장군! 만 만세다!
이러한 재가불자님들이 안 계셨더라면 아마도 오늘날의 해인사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천 박사님의 불교사랑은 모태신앙이란다.
박사님의 삶이 불교이고 불교가 바로 박사님의 삶이다.
“삼보에 귀의 하옵고.................................”
누가 처음 사용한 불교용어인지 불자님들은 제대로 모른다.
이 또한 미천 목정배 박사님의 작품이다.
대한불교청년회는 1963년 우리말 팔만대장경 편찬불사를 봉행했다.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당시화폐50만원으로 봉행된 불사이다. 당시 한국불교의 출가 재가를 총망라한 선지식들이 모두 동참한 대형 편찬불사이었다고 한다. 이때 미천 박사님도 동참했단다.
그때 한국불교최초로 발간되는 우리말 팔만대장경의 발간(發刊)사를 영예롭게도 박사님이 쓰시게 되었는데 그 발간사의 서두(書頭)가 바로
바로 그 유명한 “삼보에 귀의하옵고.........................”란다.
지금은 불자님들의 신앙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용어이다.
우리 불자들은 귀중한 불교용어의 창작자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불교용어 창작! 미천 목정배 박사님은 불교용어창작의 달인(達人)이다.
수많은 저술활동을 통해서 수많은 불교용어를 새로이 창작해 내셨다.
찬불가 작사 수천가지가 넘는다. 어느 유명 국악가가 부르는 회심곡도 나중에 알고 보니 박사님의 작품이었다.
박사님은 불자라면 어느 누가 부탁해도 다 선뜩 받아주신다.
원고료 제대로 한번 챙겨보는 적도 없다. 그저 보시다. 무주상 보시다.
“목 박사님 글 쓰신 로열티만 해도 꽤 수월찮을 겁니다.”
박사님을 좀은 아시는 불자님이 나 웅봉법사에게 물어왔다.
“박사님 한 푼도 못 챙깁니다.” 나는 딱 잘라 말해버렸다.
“아니! 왜요?” 나도 모르게 굳어진 나의 표정과 말투에 적이 당황하며 불자님이 반문해왔다. 나 웅봉법사는 미천 박사님의 무주상보시만 보면 슬며시 안타까움이 솟아난다.
그래서 나도 몰래 안타까움이 언행으로 표출되었는가 보다.
아직도 나 웅봉법사는 중생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괜히 박사님과 불자님께 모두 미안하다.
“아니 박사님은 못 챙기시는 것이 아니고 보시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얼른 표정을 바꾸고 표현마저 바꾸었다.
그랬다! 박사님은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보시이다.
박사님은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하여 재가불교 세제불교 생활불교에 한평생을 무주상보시를 하신 것이다. 박사님께서 한국불교의 현상(現狀)에 순응(順應)하셨더라면 탄탄한 부귀영달을 보장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사님은 부귀영화(富貴榮華)보다는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 고난(苦難)의 가시밭길을 스스로 선택하셨다.
당시만 해도 한국의 재가불자들은 출가(出家)불교의 외호(外護)조직에 불과했다. 재가불자 스스로는 기도나 수행의 길을 찾지를 못했다.
수행은 출가스님들의 전유물로 알았다. 제가불자는 수행보다는 시주불교에 머물렀다. 시주금액수에 따라 복(福)도 달라진다는 소위 시주(施主)불교 기복(祈福)불교가 재가불교의 대세였다.
당시의 한국불교는 출가일변도의 절름발이식 불교였다.
출가재가가 어울려진 비구 비구니 우바이 우바새 사부(四部)대중(大衆) 중심의 균형불교가 절실히 요구되든 시기였다.
그러나 출가불교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실정이기도 했다.
그런 암울한 현실에서도 출가불교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누구하나 선뜩 앞장서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숨죽이고 속으로만 웅얼대고 있었다.
그때 미천 목정배 박사님이 한국불교의 균형발전을 위해 출가중심의 구습(舊習)타파(打破)에 과감히 앞장섰다.
상상을 초월한 대한한 대 용기이시다. 온갖 질시(嫉視)와 비난 속에서도 재가불교 생활불교 정착화의 토대를 마련하셨든 것이다.
대한불교 법사회 창설이 그것이다. 법사원불교대학 개설이 그것이다.
그리고 재가불교 세제불교 생활불교의 기치를 더 높인 것이 그것이다.
대한불교 법사회는 대한민국 불교사에서 최초의 재가불교종단이다.
미천 목정배 박사님의 불교를 향한 한평생 열정(熱情)의 결정체이다.
성공한 한국 재가불교의 요람인 것이다.
한국불교역사에 기록되어야할 미천 목정배 박사님의 불적(佛迹)인 것이다. 사실 나 웅봉법사는 이글을 쓰면서 몹시도 머뭇거렸다.
박사님의 숭고한 불교신앙에 조금이라도 누(累)가 될까봐 망설였다.
나의 둔한 글 솜씨로는 박사님이 한국불교에 남긴 무한(無限)의 흔적들을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나 웅봉법사는 이 글을 쓰면서 박사님께는 일언반구의 상의도 드리지 못했다. 상의를 드렸다면 아마도 이글은 쓰질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 웅봉법사는 된통 혼 줄이 났을 것이다.
그래도 나 웅봉법사는 각오하고 이 글을 쓴다.
아니 덕산 방 임제 할을 당할지라도 이글만은 꼭 써야만 한다.
한국불교의 영원한 발전을 위해서이다. 위대한 발전을 위해서다.
미천 목정배 박사! 한국불교 최고의 선지식이요.
한국 생활실천불교의 견인차요. 한국재가불교의 개척자이시다.
그래서 미천 목정배 박사의 불적기(佛迹記)를 꼭 쓰고 있는 것이다.
왜? 박사님의 한국불교의 산(生)역사이기 때문이다.
미천 목정배박사! 박사님의 사성(四星:육십갑자로 본 생년生年, 생월生月, 생일生日, 생시生時)은 한국재가불교의 시조(始祖)신라의 복성거사(원효대사)와 똑 같다. 아마도 원효선사의 화신(化身)일지도 모른다.
참! 그렇다. 원효선사도 말년(末年)에는 재가 불자이시다.
참! 원효선사님도 많은 불적(佛迹)을 기록으로 남겨 시셨다.
그러나 재가불자 복성거사로서의 기록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재가불교의 몰락과 함께 복성거사의 재가불교기록이 훼손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미천 목정배 박사님의 불교를 향한 일구월심(一句月深) 위대한 삶을 기를 쓰고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재가불자의 위대한 불적기(佛迹記)를 말이다.
“박사님! 죄송합니다. 용서 하세요. 용서하시지 예? 예?...........예?”
박사님의 호통의 꾸지람이 자꾸만 뇌리를 스친다.
“그래도 용서하십시오.
비는 되는 무쇠도 녹는다는데! 박사님! 예!.................”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마하살!..............
나 웅봉법사는 이글을 쓰면서 출가불교에 참회하고자합니다.
글 내용에 좀 더 진솔하고자 본의 아니게 출가불교에 누(累)를 범하게 됨을 참회하고자 합니다. 송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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