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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봉법사 청와대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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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3-17 22:49 조회6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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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봉법사 청와대 방문기

나는 운이 좋아서인지 남들이 평생에 한 번 가보기가 어렵다는

청와대를 셀 수도 없이 다녀왔다.

내가 처음으로 청와대를 방문한 것은 1978년 가을로 기억된다.

민주공화당 청년당원으로 선발되어 가락동 공화당정치연수원에서

2주간의 교육을 수료하고 몇 사람으로 압축한 대표로 선정되어 영예롭게도 청와대를 방문하여 박정희대통령각하를 알현할 수가 있었든 것이다. 내가 이글에서 대통령각하를 알현하고.......라는 표현을 했는데

그때 그 시절에는 나뿐만 아니라 모두의 표현이 그랬다.

나는 첫 청와대은 한마디로 단아함이다. 사진이나 TV영상을 통해서만 봐오든 박정희대통령은 직접 상면(上面)하고보니 작고 야무치고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 넘치는 단아함을 느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일행이 머물려든 청와대 영빈관도 생각보다는 작고 정리정돈이 잘된 단아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더더욱 우리일행을 위해 제공된 저녁만찬은 최고의 단아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쌀과 보리를 반반씩 섞은 반(半)섞기 밥이 제공되었다.

반찬은 서너 가지가 차려진 것 같은데 한마디로 정결하고 따뜻하고

단아했든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날 그만찬의

밥과 국이 지금 막 짓고 끓여낸 것처럼 따뜻하고 구수했다는 것이다.

엄(嚴)하시면서도 따뜻하신 박정희대통령 내외분의 인간미 넘치는

온정을 한껏 맛보기도한 만찬이었다.

생전처음으로 대통령각하와 겸상을 하는 긴장 속에서도 우리일행은

행복한 만찬을 즐길 수가 있었다.

그날 우리 일행은 청와대 방문 기념으로 대통령휘장이 새겨진

손목시계를 하나씩 받았는데 참으로 그때는 귀(貴)하고

과시(誇示)할 수 있는 좋은 선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 시계를 착용하지를 못했다.

아니 안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지역사회 관청과유지분들의 추천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교육에

동참하고 청와대를 다녀왔지만 유신정권 철폐를 주장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주화세력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청와대 첫 방문은 내 인생의 새로운 변환점이 되고 말았다. 박정희대통령은 젊은 우리일행을 앞에 두고 시종일관 조국근대화와 부국강병과 새마을운동에 대한 당부로 시간을 다했다.

그날이후 나는 박정희대통령을 재평가할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되었고 새마을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박정희대통령 서거이후이긴 하지만 나는 새마을운동에 동참했고

전국최연소 동회장, 전국최연소 구회장, 전국최연소 광역시회장을

거쳐 가며 나의 젊음을 조국과 민족을 위한 봉사활동에 제다 받쳤다.

나는 전두환 대통령시절에도 청와대를 수차례 방문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과는 달리 스케일이 컸다.

한꺼번에 많은 인사들을 청와대로 초청을 한 것이다.

주로 영부인 이순자여사와 같이 영접을 하셨는데 만찬이나 오찬음식은 대체로 박정희대통령 시절과 종류와 규모로 제공하고 있었다.

다른 점은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제공되는 음식이라서 인지는 몰라도 밥도 국도 싸늘하게 식어 있었든 것 같았다.

옛말에 ‘찬밥은 인덕(人德)이 없다고 했든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인덕이 없었든 것 같다.

청와대 방문에서 내가 본 전두환 전 대통령은 스케일이 크고

솔직담백하고 자상한 지도자로 보였다.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위하여 올림픽체조경기장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나도 이제 퇴임하면 새마을지도자로 봉사하려고 한다.

내 고향이 경남합천인데 고향합천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까?

아니면 내 집이 서대문구연희동인데 서대문에서 지도자 활동을 할까?” 하시면서 두지역의 회장들을 단상으로 불러올려 같이 만찬을 하기도 한 것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청와대 방문 기념품에도 세심한 관심을 보였든 것으로 보인다. 손목시계도 있었고 탁상시계도 있었고

같은 시계라도 모양과 크기가 달라도 달랐다.

퇴임 시에는 감사패로 기념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전두환 전 대통령은 과식(過飾)이 없고 인정미가 넘치는

분으로 기억된다.

전두환 전 대통령!

인덕(人德)만 있었다면 그분의 평가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친구는 옛 친구가 좋고 밥은 따뜻한 밥이 좋은 것이다.

나는 노태우 대통령시절에도 수차례 청와대를 다녀왔다.

첫 번째 방문시의 음식은 한정식 풀코스였든 것으로 기억된다.

두 번째의 초정 때의 음식은 비후스택 요리로 생각된다.

퇴임을 앞둔 마지막 초청에서는 특별한 요리 없이 다과(茶菓)로

대신했든 것으로 기억된다.

노태우 전 대통령시절 청와대 방문에서는 음식보다는 기념품이

유독 더 생각이 난다.

첫 번째의 초청방문에서는 넥타이를 선물로 받았다.

마지막 초청방문에서는 넥타이핀이 포함된 가우스보단 선물로 받았다.

선물을 받으면서도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다.

넥타이라니? 넥타이는 목줄을 옭아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었든 것이다. 넥타이핀이나 가우스보단은 정리정돈

얽어매고 단속하는 하는 이미지가 확! 풍겼다.

특히 마지막초청에서는 다과회로 대신했든 까닭에 배경음악을

깔고 있었는데 실내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음악이 하모니카

연주곡으로 얼마나 충격적이었든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된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바라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나 홀로 앉자 서

이일저일 생각하니 눈물만 흐르네.


고향하늘 쳐다보니 별 떨기만 반짝거려

마음 없는 별을 보고 말 전해 무엇하랴

저 달도 서쪽 산을 다 넘어가건만

단잠 못이뤼 애를 쓰니 이 밤을 어이해.’


노태우 대통령이 하모니카 연주를 잘하시는 실력자이시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고향생각’이라는 이 노래를 듣는 순간

얼마나 썰렁했든지 모골(毛骨)이 송연(松烟)함을 감지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예감대로 노태우 전직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자 말자 역사바로세우기에 걸려들어 전직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목줄이 끌려가서 법정에 서고 감방을 가야하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노랫말처럼 친구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나란히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고 역사속의 영원한 죄인으로 낙인이 찍히고 만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은 친구로서는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YS 김영삼 대통령시절에도 청와대를 수차례 다녀왔다.

YS 대통령은 한때 내가 과할정도로 존경하고 맹종(盲從)했든 분이다.

대통령이 되길 오매불망(寤寐不忘)손 꼽아 기다리고 매달렸든 분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첫 초청 방문 시에는 YS김영삼 전 대통령좌석

과는 두 사람 건너 옆자리에 앉는 영광도 가졌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알았다. 대통령께서 만찬장에서 초청한 인사들과

나누는 대화도 대부분이 메모를 보고 하시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날 내가본 YS김영삼 대통령은 메모를 보고 하시는 대화가 좀 서툴러 보였다. 원고를 보고하시는 대화가 좀은 어색해 보였다.

하기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직대통령들은 오랜 군(軍)생활을 해오면서 부하들이 적어 올리는 원고를 수도 없이 읽고 소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 전직 대통령은 그분들과는 다른 세상을 살아왔다.

오랜 세월을 생동(生動)급변(急變)하는 예측불허의 살벌한 정치판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하는 야당생활을 해오시면서 언제 원고 쓰고

언제 메모 읽고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든 탓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YS대통령을 세인들은 직감(直感)이 뛰어난 분이라고 평한다.

그의 정치를 감(感)의 정치라고 한다.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 탄압의 불길을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직감(直感)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랬다! 오찬후반 다과(茶菓)시간에 나는 YS김영삼 대통령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가 YS김영삼 대통령이 필리핀을 방문하고 오신지 얼마 안 되는 시기였는데 라모스 필리핀대통령과 운동으로 얽힌 비화(秘話)부터

시작된 대화는 세계화(世界化)로 마무리했는데 YS의 직감(直感)이

유감없이 다 발휘되고 있었다.

과연 감(感)정치의 달변(達辯)으로 우리 일행을 설득(說得)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었다. 나 또한 넋을 빼고 빠져들었다.

그래서 한때나마 내가 빠져들었든 것 같았다.

간간히 섞여 나오는 경상도사투리도 마저도 정겹게 들렸다.

그런데 사투리 좀 심하긴 심했다.

그날 우리 일행이 대접받은 오찬 음식 메뉴는 그때 그 시절 장안의

화제가 되었든 그 유명한 YS칼국수이었다.

쫄깃쫄깃한 칼국수면 에 만두를 서너 개 넣은 특별한 메뉴의 칼국수로 기억되는데 상당한 맛을 즐겼든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사실은 그 칼국수에 대한 기억은 맛보다는 칼국수에 대한

설명이 더 인상적이었다.

YS대통령이 직접 했든 것으로 기억되는데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경상도 사투리가 심한 억양이었다.

“이 칼국수는 보통 칼국수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오신다고해서 자연산 꿩고기로 빚은 만두가 들어간

별미 칼국수입니다.”

평범한 설명이건만 내 귀에는 꿩고기의 꿩이 유독 쾅! 으로 귀전을

꽝! 하고 때렸다. 나만 그렇게들은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권 회장! 부산에는 꽝고기도 있소? 누구인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일행 중 누군가가 나에게 농담을 건네 오기도 했다.

심한 경상도사투리가 귀에 그슬린 지역에서 참석한 일행이었든 같다.

대통령이 하셨든 비서관이 했든지 확실히 기억은 못하지만 아무튼

꿩과 꽝의 중간발음의 묘한 억양의 경상도 사투리로 설명을 했다는

것이다.

“꽝! 고기가 뭐여? 꽝! 고기가?”

꽝! 꽝! 꽝 그는 어색한 발음의 꽝! 소리를 가지고 빈정대고 있었다.

그런데 YS 문민정부는 꽝! 정권이 되고 말았다.

쾅! 쾅! 쾅! 쾅! 의 연속이었다.

쾅! 하고 부산구포의 철길이 무너졌다.

꽝!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꽝!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쾅! 서해 페리호가 침몰했다.

쾅! 인천호프집 화재로 55명이 죽었다.

쾅 괌에서 대한한공 비행기가 추락했다.

쾅! 쾅! 쾅!........ 육해공에서 쾅쾅쾅 터지고 빠지고 무너지고 떨어졌다.

나중에는 나라 경제마저 꽝! 하고 박살나 I, M, F의 지배를 받는 경제속국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참! 그때도 선물은 손목시계를 받았든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는 DJ 김대중 대통령시절에도 청와대를 서너 번을 다녀왔다.

나는 DJ 대통령시절 처음 청와대의 초청을 받고 방문을 꺼렸다.

솔직히 그동안 그분에 대해 본의 아니게 지은 죄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한때 DJ 대통령을 윤대중이라고 우기고 선전하고 다녔다.

심지어는 김해(金海) 김(金)씨(氏)인 DJ 대통령이 대선을 앞두고

그분들의 시조(始祖)인 김수로왕 시제(時祭)에 참석하시려는 마저도

사람들을 동원하여 막은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DJ 김대중 전직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윤대중이라고

흑색선전을 일삼고 다닌다. 아무것도 모르는 국민들을 자기들의

이익을 얻고자 선동(煽動)하고 악용(惡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한편으로는 DJ대통령에 대한 서운한 점도 있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을 예언을 했든 사람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후보들의 한글 획수가 12획(평안)17획(혼란)을

기도를 통하여 알아내고 이회창(14획), 김대중(15획), 이인제(10획)를 비롯한 당시 후보자 중에는 12획과 17획을 자진 후보자가 없었음으로

그들의 배우자인 한인옥(13획) 이희호(12획) 김은숙(13획)의 획수를 감안하여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강력히 예언하였든 것이다.

(웅봉박사저서 “푼수법사 분수보살”에 상세히 쓰고 있음)

나의기도를 통한 예언을 듣고 예언을 풀이한 원고를 가지고간

자칭 DJ의 선거참모는 당선되면 후사하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그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소식을 끊고 있었기 때문이다.

DJ 국민의 정부시절 나의 첫 청와대 초청방문 때 우리 일행이

대접받은 오찬은 전주식 비빔밥으로 기억된다.

아주 정갈하고 맛깔스런 음식이었든 것으로 기억된다.

대한민국 건국(建國)이래 최초로 선거에 의한 여야 전권교체인지라

탈도 많고 말도 많았든 시절이다.

특히 나라경제가 꽝! 하고 폭삭 내려앉은 I. M. F시절이라 책임공방을 두고 나라 안 밖이 제다 소용돌이 치고 있을 때이기도 했을 때이다.

국민들이 처벌과 보복이 구별이 안 되는 때이기도 했든 시절이다.

정권을 빼앗긴 쪽에서는 보복이라고 떼를 쓰고 정권을 잡은 쪽에서는 나라경제를 두 동강내 국민들을 거지로 만든데 대한 책임을 묻는 처벌이라고 변명했다. 국민정서도 두 동강이 나서 처벌과 보복에 대한

갈등이 심각했든 시절이기도 했다.

그때의 오찬이 비빔밥이라니? 시기적절했든 것으로 기억된다.

그 비빔밥의 저력인지는 몰라도 그때 그 비빔밥을 대접받은 우리일행은 I. M. F를 극복하고 나라경제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든 것으로 기억된다. 새마을부녀회에서 처음 시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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