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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바위에는 부엉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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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3-17 22:50 조회6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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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바위에는 부엉이가 없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하면 떠오르는 지명이 봉화산 부엉이 바위이다.

이 부엉이 바위에 얽힌 애처로운 기막힌 사연의 전설이 전해온다.

부엉이바위 입구 하마바위를 지나면 마애여래좌상불(磨崖如來坐像佛) 부처님이 옆으로 누워 계신다.

이 마애불(磨崖佛)부처님의 훼불(毁佛)과 얽힌 안타까운 전설이다.

어쩌면 이 전설은 영원한 서민 고(故)노무현 전직 대통령의 안타까운 서거의 시발점인지도 모른다.

봉하마을은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에 속한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몇 집 살지 않았으나 50여 년 전 마을 앞

습지대를 농지로 개간하면서 주민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현재 40여 가구 100여명이 농사를 짓고 살아간다.

‘봉하’란 마을 이름은 봉화산 아래를 뜻한다.

봉화산(140m)은 봉홧불을 올리던 봉수대가 있던 산이다.

본디 이름은 자암산(子庵山)이다.

자은암(子恩庵)이란 암자가 있던 데서 유래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봉홧불을 올리던 자암산 봉수대 기록이 나온다. 자은암은 이름만 전하는 암자(庵子)다.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許)황후가 태자(후에 거등왕)를 위해 창건했던 암자라고 한다.

부엉이바위 옆 쓰러진 마애불 아래 빈터가 바로 자은암 터라고 한다.

봉화산 줄기엔 부엉이바위, 사자바위, 병풍바위 등 바위 절벽들이 있다. 부엉이바위엔 수리부엉이가 둥지를 틀고 있어 저물녘이면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주민들 말한다.

그러나 부엉이 바위 주변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실제로 부엉이 둥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부엉이가 살기에는 인가(人家)와 너무 가까웠다.

일설에 위하면 임진왜란 당시 밀양(密陽)성을 공략한 왜군들은 낙동강을 건너야하는 어려움으로 수많은 전사자(戰死者)를 남기고 실패를 거듭하다 끝내 포기했다고 한다. 나중에 진해로 상륙하여 마산 창녕을 우회(迂廻)하여 밀양을 점령했다고 한다. 밀양(密陽)성을 점령한 왜군들은 밀양이 호국불교(護國佛敎)의 근원지임을 알고 그 보복(報復)의 일환으로 밀양 인근의 사찰들을 방화하고 모조리 다 파괴했다고 한다.

그때 왜군들의 방화파괴로 천태산의 부은암도 소멸되었다.

아버지의 은혜를 뜻하는 부은암(父恩庵)이 소멸되었으니 부은암은

당연히 아들의 은혜를 뜻하는 자은암(子恩庵)으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아버지집이 불타 없어졌으니 아들집으로 옮겨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이후로 자은암은 자은암 또는 부은암으로도 불리기 시작했다.

봉화산은 천하의 명산이다. 봉홧불을 올려서 봉화산이라고 한다고 하나 그 이전의 이름은 봉황산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봉황산(鳳凰山)이 아닌 격을 한품 낮춘 학(鶴)산으로도 불린다.

봉황산 건너편 산을 지금은 뱀 산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산의 본래 이름은 용(龍)산(山)이었고 한다.

용산의 용(龍)머리 형상 앞쪽(화포천 쪽)엔 논 한가운데 작은 봉우리가

솟아 있다. 주민들은 이걸 ‘개구리 똥 뫼’(개구리 독 뫼)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봉우리는 원래 늪지로 둘러싸인 산(山)이었다.

이 나지막한 산의 옛 이름은 용주(龍珠:여의주)산(山)이란다.

원래 봉하마을 일대는 새로운 왕조가 건국할 도읍지라고도 하고

임금이나 대통령이 태어날 명당이라고도 한다.

봉황은 대통령을 뜻한다. 대통령의 휘장이 봉황이다.

용(龍)은 임금을 뜻한다. 왕이 앉는 자리를 용상(龍床)이라고 한다.

임금의 얼굴을 용안(龍顔), 임금의 옷을 용포(龍袍)라고 한다.

용(龍)은 여의주를 얻으면 승천(昇天)한다. 왕이 되는 것이다.

한일합방을 전후로 일본인들이 곡물(穀物)착취를 목적으로 곡창지대인

김해를 찾아 물밀듯 몰려들었다.

김해평야의 농지 구획 정리는 일본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때 진영을 거쳐 봉하마을에 도착한 왜인들은 봉하마을의 풍수지리에 깜짝 놀라 기겁을 하고 말았다고 한다.

봉하마을 일대가 바로 강력한 새로운 국가의 지도자가 될 큰 인물이

두 명이나 배출될 명당중의 명당(明堂)이었기 때문이다.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에 속하는 봉하마을은 지금 현재는 40여 가구 1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으나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몇 집 살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 왜인들에 의해서 마을 앞 습지대를 농지로 개간하면서 주민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그때 왜인들에 의해서 봉하마을 명당이 철저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왜인들은 우선 지명(地名)부터 바꾸기 시작했다.

봉황산(鳳凰山)을 학산(鶴山)으로 바꾼 것이다.

용산(龍山)을 뱀 산(山)으로 바꾼 것이다.

용주(龍珠:여의주)산을 개구리 똥 뫼로 바꾼 것이다.

봉황(鳳凰)이 학(鶴)이 되고, 용(龍)이 뱀이 되고,

여의주(如意珠)가 개구리 똥으로 바뀌어 진 것이다.

봉황과 용(龍)이 서로 손잡고 여의주를 득(得)하여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큰 인물이 배출될 명당 터가 졸지에 하루아침에 개구리 한 마리를 사이에 두고 학과 뱀이 서로 다투며, 서로 견제하며, 서로 헐뜯는

천하(天下)에 몹쓸 흉(凶)터로 바뀌고 만 것이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화마을을 찾은 방문객들과의 나누는

대화(對話)에서도 고스란히 이러한 지명(地名)이 등장하고 있다.

“봉화산은 학산(鶴山)이라고도 하는데 맞은편 산은 뱀처럼 생겼다고

뱀 산(山)이라고 합니다.

그 사이에 개구리처럼 생긴 개구리 산(山)이 있습니다.

보이시죠? 흡사 뱀이 개구리를 노리고 있지만 학(鶴) 때문에

못 잡아먹고 있는 형세입니다.

나는 약자인 개구리를 지키는 파수꾼 학(鶴)이 좋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다운 고향마을에 대한 자랑이다.

안타까운 것은 노무현 대통령마저도 고향땅 봉하의 봉황산(鳳凰山),

용산(龍山), 용주(龍珠:여의주)산(山)에 얽힌 ‘봉하의 잔혹사(殘酷史)’에 관한 진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봉화산 마애불에 얽힌 전설은 더 안타깝기 그지없다.

당(唐)나라 여걸(女傑) 측천무후(則天武后)와 그를 제도(濟度)하고자하는 한 스님과의 얽히고설킨 인연의 애사(哀史)이다.

측천무후는 중국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皇帝)가 되었던 인물이다. 측천무후(則天武后)라는 호칭은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皇后)로서의 지위를 나타내지만, 690년 당(唐)의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皇帝)가 되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호칭이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는 인물이다.

그녀의 이름인 ‘조(曌)’는 ‘비출 조(照)’의 뜻을 나타내는 측천문자

(則天文字)로서 해(日)와 달(月)이 하늘(空)에 떠있는 모양처럼

세상을 비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당(唐)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에서 당(唐)의

건국 공신(功臣)인 무사확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무후는 14세에 당태종(太宗)의 후궁으로 입궁하여 4품(四品)벼슬인

재인(才人)으로서 태종에게 ‘미(媚)’라는 이름을 받아 ‘무미랑(武媚娘)’이라고 불렸다. 태종이 죽자 무후는 황실(皇室)의 관습에 따라 감업사(感業寺)로 출가(出家)하여 비구니 스님이 되였다.

그러다 태종의 후궁시절부터 서로 연민(憐愍)의 정을 나누던 황태자, 당 고종(高宗)의 후궁으로 다시 입궁하여 2품(品)벼슬인 소의(昭儀)가 되어 아버지(태종)와 아들(고종)의 후궁이 되는 천륜(天倫)을 거부하고 인륜(人倫)을 파괴하는 파렴치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노쇠(老衰)한 당 태종과 병약한 고종을 독살했다는 일설도 있다. 야망을 채우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는 요망(要望)하고

독(毒)한 여인의 대명사로 통하는 여인이다.

무후는 고종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낳았으며 나중에는 고종의 황후(皇后)를 몰아내고 자신이 황후(皇后)가 되었다.
황후자리를 차지한 무후는 병약(病弱)한 고종을 대신해서 정무(政務)를 맡아보며 신진 세력을 등용해 권력을 장악하였다.

자신의 장남인 이홍(李弘)을 황태자로 봉하고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통해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치하였다.

고종의 병세가 악화하자 무후는 섭정(攝政)이 되어 전권을 행사했으며, 장남인 황태자 이홍이 죽자 둘째 아들인 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다. 그러다 이현(李賢)을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인 이현(李顯)을 황태자로 세웠다. 이 이현(李顯)이 아버지 고종(高宗)이 죽자 황제가 되었는데 이가 바로 당(唐)의 4대 황제인 중종(中宗)이다.

하지만 중종의 황후(皇后)인 위후(韋后)가 아버지 위현정(韋玄貞)과

함께 정권(政權)을 장악하려 하자 중종을 폐위시키고 넷째 아들인

이단(李旦)을 황제로 세웠다. 그가 당의 5대 황제인 예종(睿宗)이다.

무후(武后)는 반대파에 대한 밀고와 감시에 기초한 정보(情報)를 앞세워 공포정치를 펼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처럼 황실(皇室)안팎의 반대파를 제거한 무후는 끝내 넷째아들

예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라 하고 수도를 장안(長安)에서 낙양(洛陽)으로 옮겼다.

그녀의 대주(大周)통치는 15년으로 끝나고 무후는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나게 되고 황태자로 강등되었던 중종(中宗)이 복위되어 당(唐) 왕조가 부활하고 무후는 별궁(別宮)에 유폐(幽閉)를 당하게 되었다.

별궁에 감금된 마침내 무후는 705년 12월5일에 황제가 아니라

황후(皇后)로서 생(生)을 마무리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야망(野望)의 여걸답잖게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일평생은 욕망과 야망으로 얼룩진 꿈 많은

한 여인의 안타까운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불교와의 인연 또한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한다.

야망과 격정(激情)으로 점철(點綴)되는 그녀의 인생관처럼 불교와의

인연도 지나치게 신앙했다가 지나치게 배척하는 극(極)과 극을 달리하는 엄청난 괴리(乖離)를 보여주고 있다.

측천무후의 무소불의 권력과 욕망을 위해 무한질주하는 인생관에

견제를 가하는 선지식이 한 분 계셨다. 현무(顯無)이라는 스님이셨다.

무후(武后)가 감업사(感業寺)에서 비구니 생활을 할 당시에 인연이

된 스님이다. 스님은 무후(武后)의 지나친 야망을 견제하고 바른길로

제도(濟度)하길 서슴지 않았다.

목숨을 담보로 충간(忠諫)하고 견제했던 것이다.

무후(武后)가 불교를 깊이 신앙하고 숭상(崇尙)할 때는 현무(顯無)스님의 충간(忠諫)은 큰 위력을 발했다.

그러나 무후가 불교를 배척하고 훼불을 가할 때는 스님 역시 배척과

죽음의 길목을 오가고 있었다.

현무(顯無)스님의 충간(忠諫)과 견제에 부담을 느낀 무후(武后)는

신통력을 가진 요승(妖僧)을 불러 현무(顯無)스님이 고이 잠든 틈을 타

스님을 돌 속에 가두어 멀리 보내버리라고 명을 내렸다.

무후(武后)의 명을 받은 요승(妖僧)은 현무(顯無)스님을 해동 신라

땅 산자락 돌 속에 가둬 마애불(磨崖佛)로 만들어 버렸다.

이 마애불이 김해 봉하마을 봉하산의 마애불이라고 한다.

이 마애불은 지금도 봉하산 부엉이 바위 입구 좁은 바위틈새에

끼여 옆으로 쓰러져 처량한 모습으로 누워있다.

이 마애불이 언제 쓰러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이 마애불(磨崖佛) 역시 왜인들이 봉하마을의

큰 인물 출현을 저지하기 위하여 옆으로 무너뜨리고 큰 바위로 그 위를 짓눌러 기(氣)를 덮어 버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옆으로 쓰러진 마애불 위를 지름 1.5m

크기의 커다란 바위가 짓누르고 있었다고 한다.

마애불을 파괴하는 왜인들의 무지막지한 훼불(毁佛)의 현장을 보고도 당시의 마을 주민들은 아무런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단다.

서슬 퍼런 일본 제국주의의 총칼 앞에 숨죽이고 살 수 밖에 없었다. 마애불(磨崖佛)을 덮어 짓누르고 있는 바위를 없애야만 마을이 평화로워지고 큰 인물이 배출된다는 말들만이 비밀리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안타까운 사연은 오랜 세월을 소리 없이 입에서 입으로 흘러 다니다가 마침내 1987년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새마을 사업으로 바위를 제거했다고 한다. 마침내 마애불(磨崖佛)부처님이 비로소 숨을 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로 세워지고 제자리를 차지하는 못했다.

그런데도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1988년에 이곳 봉하마을 출신인

노무현이 13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의 실세를 물리치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대한민국 정치사에 또 하나의 큰 획을 남긴 큰 인물 ‘서민 대통령’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입문(入門)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만일 그때 바위만 제거할 것이 아니라 마애불(磨崖佛)을 바로 일으켜 제자리에 세웠더라면 큰 인물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운명(運命)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영원한 서민의 벗’ 노무현 대통령을 먼저 떠나보내고 나서야 마을 주민들은 한번쯤 후회도 해본다고 말한다.

마애불은 통일신라 후기나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의 옛 어른들은 이 마애불의 전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왜인들의 훼불로 인한 마을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마을 뒷산에

대나무를 많이 심게 되었다는 설명도 해준다.

그러면서도 왜 좀 더 일찍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을까?

힘없고 못사는 약소민족이자 서민이기 때문이다.

부엉이 바위는 부엉이가 살고 있어 부엉이 바위가 아니란다.

그 옛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왜군의 방화로 불탄 천태산(天台山)의 부은암(父恩庵)이 아들의 집, 봉하마을 자은암(子恩庵)으로 옮겨왔고

그 부은암이 또다시 한일합방으로 이 땅을 침략한 왜인들에 의하여

자은암과 함께 철저히 파괴되고 불타 소멸(燒滅)되어 사라진 것이다.

그 후 토착민들은 원래부터 있었던 자은암은 어렴풋이 기억을 하고

있으나 잠깐 옮겨왔다가 소멸된 부은암은 기억을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부은암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면 부은암의 ‘암자 암(庵)’을

‘바위 암(岩)’으로 착각하고 부은바위! 부은바위! 한 것이 부엉이 바위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부은암이든 부엉이 바위이든 봉하땅은 일인(日人)과의 관계가 깊다.

일본인들의 침략 야욕에 원주민들이 희생된 것이다.

원주민을 비롯한 서민들은 일인(日人)들뿐만 아니라 당(唐)나라

측천무후의 야망에도 희생된 전설(傳說)을 가지고 있다.

봉하마을의 원주민뿐만 아니라 이 땅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모두가 다 그랬다. 일본 제국주의를 비롯한 외세(外勢)의 침략 앞에 굴복하고

일부 약삭빠른 기회주의자들은 줄 잘 서서 출세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저항하고 투쟁해 온 서민들은 희생당하고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유난히 외세(外勢)지향적(指向的)이다.

한때는 중국을 대국으로 모시고 중국에 빌붙는 사대부가 출세했었다.

한때는 일본을 조국으로 모시고 일본에 충성하는 친일파가 출세하기도 했다.

지금은 미국을 종주국(宗主國)으로 모시고 미국말만 잘해도 출세한다. 정치도 미국식, 경제도 미국식, 교육도 미국식, 문화도 미국식이다.

심지어 종교도 미국 종교만 믿으면 출세하고 성공한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곳 출신 서민 대통령이다.

그는 중국에 빌붙었던 사대부(士大夫)집 자손이 못된다.

그는 일본에 충성했던 친일파 자손도 못된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한 유학파도 아니다.

그는 미국을 따르고 선호(選好)하는 친미정치인도 아니다.

그는 애당초에 그는 그런 인물이 되기에는 글렀다.

그러기에는 그가 너무 서민적이었기 때문이다.

소박하면서 지조(志操)있고 절개를 숭상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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