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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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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3-17 22:45 조회7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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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의 진실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참 자(字)만큼 많이 사용되는 글자도 드물다.

말도 참말이 있고 거짓말도 있다.

거짓이 아닌 진짜를 나타내는 말이다.

모든 사물에 참자만 붙이면 진실 된 것이 된다.

참기름 참외 참나물 참나무 참깨 참게 등수도 없이 많다.

모두가 다 거짓 아닌 허위 아닌 진정(眞情)을 나타내는 말이다.

참! 내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의 참자(字)는 또 다른 의미로 쓰인다.

문득생각이 나거나 느낌이 극에 달했을 때 “참말로! 의 참 자(字)와

“참 귀가 막혀서!” 와 “참 어제일은 잘 되어서!”의 참 자(字)는

과연 이라는 뜻의 말로 쓰인다.

참회(懺悔)를 줄여서 참(懺)이라는 말로 쓰기도 하고

또 다른 참(斬)은 무시무시한 참수(斬首)를 참(斬)이라고 쓰기도 한다.

또 있다. 참(站)은 길가다가 쉬어가는 곳을 뜻하는 글자(字)이다.

우리인생 한평생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가는 길이 참되게

살아가는 길일까?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과연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왔는지 뒤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내가 나를 생각해도 참말로 귀가 막히는 한심한

인생을 살아온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후회 막급한 잘못된 인생을 살아온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 그때는 왜 그렇게 밖에 못했을까?

스스로 판단해도 부끄러운 사건들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래 그때 그 일을 참 잘한 일이야! 라고 만족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지 궁금할 것이다.

스스로 내가 살아온 인생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참회(慙悔)또는 참회(懺悔)라고 한다.

막상 참회를 위하여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내인생살이가

비참(悲慘)하고 무참(無慘)할 것이다.

내가 나를 생각해도 죽(참斬)이고 쉽도록 밉고 내가 나를 생각해도

불상(참慘)한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그럼 그때 우리는 참회(懺悔)를 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열일을 제처 두고 우선 참회를 하는 것이다.

참회를 생활화하는 인생이 진정한 인생을 살아가는 길이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참회는 무슨 놈의 참회?

하고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이것이 중생들의 삶이다.

참! 참자(字)중에 쉬어갈 참(站)자도 있다.

노동일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먹는 음식을 쉴 때 먹는다 하여

쉴 참(站)이라고 한다.

아침과 점심, 점심과 저녁 식사시간 중간에 먹는 음식이라고 하여

새참(站)이라고도 한다.

새로운 삶을 위하여 휴식시간을 갖고 새로운 힘을 축적하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인생을 위하여 참회라는 참(站)을 갖고

보람 있는 활력소를 재충전하는 것이다.

참회에는 두 가지 참회가 있다.

금생(今生)에서 자신이 저질은 일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뉘우치는 참회(慙悔)와 세세생생 이어오면서 자신이 저지른 일체

모든 업장을 회개하기로 부처님과 신들에게 맹세하는

참회(懺悔)가 있다.

부처님이나 신(神)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참회 이다.

이때 참회를 통하여 잘못을 용서하고 새로운 다짐을 받고 계(戒)를

주는 사람을 참회사(懺悔師)또는 참회스님이라고 한다.

유명(有名)인사들이 자신의 인생을 기록으로 한 자서전을 많이들

남기기도 하는데 원래 자서전은 자기가 살아온 한평생 인생을

뒤돌아보고 부끄럽고 잘못된 일을 기록으로 남겨 후손이나

후세사람들의 길잡이가 되고자 하는 의미(意味)가 강한 것이다.

외국인들이 남긴 자서전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중심의

주관적(主觀的) 삶들을 비교적 객관적(客觀的)시각(視覺)으로 뒤돌아보고 잘못을 뉘우치는 회고록(回顧錄)이나 참회록(懺悔錄)들이 많다.

대한민국의 유명 인사들이 남긴 자서전들은 그들이 얼마나 모범되고

훌륭한 인생을 살아왔는지 잘은 몰라도 온통 자기 자랑 일색이다.

자서전이 아니라 자신을 선전(宣傳)하기위하여, 자신을 내세우기

위하여 유명작가를 동원한 P. R전(傳)이요. 타서전(他書傳)이다.

꼭 자서전이 아니라도 참회를 통하여 죄를 용서 받으려는

참회정신으로 쓰는 소설을 참회소설이라고 한다.

루소의 참회록(懺悔錄)은 대표적 참회소설이다.

부처님은 일체중생이 업장을 소멸하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데는

첫째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는 참회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불교에서 말하는 참회는 참회(懺悔)를 말하는데 다른 말로는

참괴(慙愧)라고도 한다.

“마음을 청정(淸淨)이하고, 몸을 단정(端整)하고, 속으로 참괴(慙愧)한

생각을 가지고 밖으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을 일으킨다면

멸(滅) 하지 못할 죄가 없느니라. 고 부처님은 설하셨다.

참괴(慙愧),의 마음이란 무었을 말하는 것일까?

참(慙)은 부처님에 대한 부끄러움을 말한다.

진리에 대한 부끄러움을 말한다. 하늘에 대한 부끄러움을 말한다.

참(慙)은 스스로 참회하여 맺힌 원결을 풀어나가는 것을 말한다.

참(慙)은 자기가 저질은 잘못에 대하여 스스로가 수치심을 가지고

뉘우치며 스스로 착한 일을 통하여 선업(善業)을 짓는 것을 말한다.

괴(愧)는 다른 사람에게 대한 부끄러움을 말한다.

다른 중생에 대한 부끄러움을 말한다.

괴(愧)다른 사람에게 다른 중생들에게 자기의 잘못을 드러내

고백(告白)하고 그들로 하여금 용서를 받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맺힌 원결(怨結)의 결박(結縛)을 풀게 하는 것이다.

이두가지 방법의 참(慙)과 괴(愧)는 수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수행에

장애를 없애고 낙(樂)을 얻게 하는 수행의 바른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수행자들이 행(行)하는 계율(戒律) 중에 자자(自恣)라는

참회의 방법이 있다. 하안거(夏安居)의 마지막 날 정진하던 대중스님들로

하여금 안거(安居) 수행 중에 눈으로 보고(見), 귀로 듣고(聞),

마음으로 화두(話頭)를 탐구(疑)하는 세가지일을 행(行)함에 있어서

자신이 범(犯)한 죄과(罪過)를 대중들에게 고백(告白)하고 용서를

구하는 참회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남의 허물은 잘 꼬집어 내면서도 자기의 허물은 잘 모른다.

사람들은 남의 허물은 들추어내 말하기 좋아하면서 자기의 허물을

남에게 드러내기를 싫어하고 감추기를 좋아한다.

자기의 허물을 반성하고 고쳐 나가는 것을 불교에서 참회(懺悔)라고

하는 것처럼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告解聖事)라고 한다.

고해성사는 자신의 저지른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는 하느님께 고백하게 되어 있어나 하느님을 대신한

신부(神父)님께 고백하면 죄를 면죄 받는 것으로 되어있다.

아무리 큰 범죄를 저질어도 하느님을 대신한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올리면 법률적 실정법(實定法)은 몰라도 인간이 저질은 원죄(原罪)는

소멸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대신하여 고해성사를 받은 신부님은

고해성사를 통하여 얻은 일체의 정보와 비밀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

비록 고해성사를 한 사람이 살인을 저질은 중죄인이라도 보호해야할

종교적 의무와 권리가 있는 것이다.

한때 명동성당이 학생데모나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소위 시국사범(時局事犯)들의 피난처 역할을 전담한 경우도 있다.

천주교 교리에 의하여 성당의 신부님을 찾아와 고해성사한 사람은

범죄유무에 관계없이 하느님을 대신한 성당에서 지켜주어야 한다.

죄질(罪質)의 강약(强弱)에 관계없이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슬이 시퍼런 군사정권시절 명동성당을 찾아든 시국사범들을 끝까지

지켜주고 정부와 힘든 타협을 통하여 해결점을 찾아 보호해 주었든

것이 이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권력 앞에 의연한 자세로 임하셨든

선종하신 고(古) 김수환 추기경님의 생전의 당당하든 모습이 바로

천주교 참회의 고해성사의 본질을 보여주신 것이다.

정부의 졸렬한 미국과의 소고기 협상파동이 몰고 온 전 국민들이

참여한 촛불시위의 주동자들이 서울 조계사로 몰려들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부처님의 품안으로 피신을 온 것이다.

그러나 불교계는 그들을 지켜내지 못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님이 탑승한 차량이 검문검색을 당하는 등

온갖 수모를 다 당하면서도 지켜줄려고 무던히도 애써서나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고 보호는커녕 그들을 검거라는 삭막한 세찬바람이

부는 거리로 내몰고 만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왜? 그랬을까? 정부의 대응방법 부터 달랐다.

검찰을 비롯한 경찰등 사법당국의 시각(視覺)이 판이(判異)했다.

명동성당은 뭐인가에 두려움과 경계심으로 접근했으나 조계사는

아무런 경계심 없이 소홀하게 취급하고 들어온 것이다.

왜? 그랬을까? 불교계의 대응방법부터 달랐다.

애초부터 그들을 보호하고자하는 생각부터 판이(判異)했다.

천주교는 꼭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절대적 의무감으로 접근했으나

불교는 꼭 그들을 보호해야한다는 의무감이 부족했다.

꼭 그들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사명감 없이 소홀히 접근했든 것이다.

연말 입시불공 철에 사찰입구를 봉쇄한 경찰들이 출입하는 불자들을

일일이 이 잡듯이 검문검색을 강화(强化)하고 있으니 귀가 막히고

참말로 숨통이 막힐 지경이었다. 세계역사에서 종교시설을 그렇게

오랜 세월 장기간 포위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당나라에 포위된 안시성도 아니고 불교계가 지쳐갔다.

그들에게 철수를 요구한 것이다. 날라든 새 짐승도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이 꼭 불교가 아니라도 동양의 미덕인데 대자대비의

불교계가 인욕(忍辱)을 외면하고 그들을 거리로 내몬 것이다.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장시간 노숙에 지친 그들 스스로가 보호받기를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있다. 불교계의 자생능력이다. 자활능력이다.

한국천주교 뒤에는 로마 교황청이라는 막강한 힘이 있다.

한국 기독교 뒤에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개신교국가들이 소위

인권보호라는 미명아래 거대한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있다.

불교계는 그런 힘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가 깔본 것이다.

그래서 검찰이 경찰이 무시하고 천대하고 깔아뭉갠 것이다.

그래도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불자들은 모른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참으로 한심한 불자들이다.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부처님께 사죄하고 참회해야한다.

아직 대한민국은 불교국가이다. 대다수 국민들의 정서는 불교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아직까지는 불교를 믿는다.

불교를 지키고 불교다운 불교는 우리가 가꾸고 키워나가야 한다.

우리 불자님들의 손으로 불국정토를 만들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참회는 속죄(贖罪)를 말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짓고 태어난다는 원죄(原罪)론 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자신을 하나님께

송두리째 모두 받쳐 잘못을 용서를 받는 것이다.

인간의 죄를 용서할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란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잘못을 용서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참회(懺悔)대신 회개(悔改)라는 용어를 많이 쓴다.

회개(悔改)는 이전(以前)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을 뜻하는 말이다.

스스로 고백하고 고쳐나가는 참회나 고해성사가 인간의 내면적 의식에

작용하는 자율적 개선책(改善策)이라면 회개는 나보다는 남을 우선

고쳐가려는 외면적 교육에 작용하는 타율적 요소가 많다.

기독교는 타종교와는 달리 왕성한 선교활동을 한다.

그리고는 끝임 없이 “회개하라! 고 소리 높여 외쳐댄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들 자체가 회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옛날 우리가 어렸을 때 밤에 오줌을 싸 이불에 지도를 그릴 때가 이었다.

요즘 어린아이들도 자주 오줌을 싸 이불에 지도를 그린다고 한다.

미국아이들은 오줌을 싸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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