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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불교, 받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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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3-17 22:46 조회5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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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불교, 받는 불교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불교에서는 무주상 보시(布施)라 하여 착한 일을 베풀었으면 착한

일을 한 당사자도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다.

주(住)는 머무는 곳이라는 뜻으로 집착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라서 무주(無住)라는 말은 고정적인 집착을 부정하는 의미이다.

내가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생각마저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보시(布施)의 의미이다.

보시는 베푸는 행위, 내용, 태도,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될 수가 있다. 또 보시는 베푸는 사람(施者)과 받는 사람(受者)과 베푸는

내용이 되는 물건(施物)이 원래 본질적으로 공(空)한 것이어서

거기에는 아무것도 집착함이 없어야 한다.

삼륜체공(三輪體空) 또는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 하여 보시(布施)는 베푸는 물건에다 기준(基準)을 둘 것이 아니라 베푸는 마음을 표준으로 해야 한다.

보시는 크게 나누어 불자(佛子)들이 사찰에 시주하는 재보시(財布施)와

불자들의 공양(供養)을 받아 수행한 수행자들이 수행의 결과물인

진리를 불자들에게 회향하는 법보시(法布施)가 있다.

또 승속(僧俗)을 불문하고 탐(貪), 진(嗔), 치(痴), 삼독(三毒)으로 발생하는 온갖 공포(恐怖)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무외시(無畏施)가 있다.

재시(財施)와 법시(法施)의 둘을 합하여 이종시(二種施)라 하고 여기에 무외시(無畏施)를 합하여 삼종시(三種施)라 하여 보살이라면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행위라고 경전(經典)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또 재보시(財布施)는 탐심(貪心)을 여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거룩한 청정시(淸淨施)와 그렇지 않은 불청정시(不淸淨施)로 나눈다. 법시(法施)도 인천(人天)에 태어나는 세간(世間)법시(法施)와 깨달음을 증득하는 행위를 가르치는 출세(出世)법시(法施)로 나눈다.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서품(序品)에서는 재가(在家)의 보살(菩薩)은 재시(財施)와 법시(法施)를 베풀고 출가(出家)의 보살(菩薩)은 필시(筆施), 묵시(墨施), 경시(經施), 설법시(說法施)의 사시(四施)를 행(行)하고

보살 제8지(地) 부동지(不動智)의 깨달음을 증득함을 인가(認可)받은 무생인(無生忍)보살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여(眞如)를 깨달아 알고 거기에 안주(安住)하며 시(施), 대시(大施), 무상시(無上施)를 갖추고 베풀 수가 있다고 한다.

불기 2553년 기축년 대한불교 법사회 하계수련대회를 우리 능엄정사에서 가졌다. 전국에서 많은 법사님들이 능엄정사로 모여들었다.

서울에서 강원도에서 호남에서 영남에서 세제(世濟)불교를 실천 수행하는 대한불교 법사회 법사님들이 열일을 제처 두고 동참해온 것이다.

대한불교 법사회는 대한민국 종교계의 최고의 지도자 목정배 법사님에 의해 설립된 한국 재가불교의 유일한 신행단체이다.

목정배 법사님은 대한민국불교계에서 승속(僧俗)을 떠나 최고의

선지식(先智識)님이시다.

대한민국 불교계의 마르틴 루터? 이시다.

솔직히 한국불교는 절름발이 불교인지도 모른다.

불교의 신행주체는 사부대중(四部大衆)들이다.

출가(出家)불교의 비구(남자)스님, 비구니(여자)스님들과

재가(在家)불교의 우바새(남자신도), 우바이(여자신도)를

사부대중이라고 이들이 불교를 이끌어가고 수행해 가는 것이다.

불교를 나타내는 만(卍)자(字)도 십(十)자(字)의 네 방향의 대중들이

서로 화합하여 유기적(有機的)으로 한 방향으로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른데 한국불교에는 출가(出家)는 있는데 재가(在家)는 없었다.

조선 500년 숭유(崇儒)배불(排佛)정책의 결과이다.

불법(不法)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簒奪)한 불한당들은

자신들의 역적죄(逆賊罪)를 희석(稀釋)하고 모면(謀免)하고자 죄(罪)

없는 불교계를 희생양으로 선택한 것이다.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는데 불교계가 제물이 되어 당한 것이다. 고려 말(末) 수행과 중생구제라는 불교본연의 의무를 망각(妄覺)한 채

불국정토 구현이라는 미명(美名)아래 권력에 휩쓸려온 일부 권력(權力)승(僧)에 의한 업보(業報)로 불교계가 무너져 갔든 것이다.

토지를 비롯한 사찰재산은 몰수당하고, 승려는 천민으로 강등당하고, 심지어는 노비로 팔려 나가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스님들의 도성 출입마저도 철저히 봉쇄당하는 시절이었다.

절간에다 돼지잡고 소 잡는 푸줏간을 차리고,

술 팔고 기생 파는 기생집을 만들고, 죄 없는 스님들을 잡아다가

이놈저놈 하대하고 혹사(酷使)시키고 심지어는 죽여도 죄(罪)가

되지 않는 시절이 이 땅에서 500년을 이어온 것이다.

세계종교 탄압사(彈壓史)에서 이처럼 지독(至毒)하고 이처럼 장구(長久)한 세월을 지속된 기록은 찾아 볼 수조차 없다.

정말로 애석(哀惜)한 통한(痛恨)의 안타까운 아픔의 역사인 것이다.

그래도 우리스님들은 인욕(忍辱)하고 정진(精進)하며 용케도 잘 지키고 잘 이어왔다.

그러나 전통불교의 본질(本質)은 훼손되고 바탕은 무너져 버린 것이다.

도성에서 쫓겨나고 제도권에서 밀려난 스님들은 전통불교 정법수행은 고사하고 호구지책(糊口之策)에 겁겁해야 했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중생구제는 시야(視野)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그렇게도 금기했든 신통력도 발휘하고

운명도 점쳐주고 사주관상에 빠져들었다.

권력층의 한심을 사기위하여 유교(儒敎)사상을 유입하고

도교(道敎)사상을 도입하고 심지어는 무속에도 빠져들었다.

이러한 암울한 500년 넘는 세월을 거쳐 오면서 불교는 중생구제라는

베풀어주는 불교의 본질을 벗어나 어떤 경우라도 무슨 짓을 해서라도 중생들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받는 불교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작금(昨今)의 한국불교는 불교의 본질인 중생구제를 위한 지침서 하나

제대로 없다. 재가불자들은 어떤 가르침이 올바른 가르침인지 모른다. 어떤 신앙방법이 제대로 된 신앙방법인지를 몰라 방황하고 있다.

가르치는 스님에 따라 달라지는 지도방법에 헷갈리고 있다.

평생을 절에 다닌 불자(佛子)가 사찰예절도 제대로 모른다.

사찰에서 운영하는 불교대학을 졸업한 불자(佛子)도 부처님께 절(拜)도 제대로 못 올리고 육법공양(六法供養)도 제대로 모르고 못 올린다.

안타깝게도 제대로 안 가르치고 제대로 못 배운 것이다.

그러면서도 재가불자(在家佛子)들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 별별 불사(佛事)가 다 있다.

기상천외(奇想天外)한 선지식이 다 있고, 나르고 기는 신통(神通) 묘용(妙用)한 도사님들이 다 있다.

그러면서도 재자불자들의 올바른 신행방법하나 제시하지 못한다.

재가불자들의 본연의 신행방법은 수행(修行)이 우선인데 한국의

재가불자들은 수행이 아니라 불사(佛事)에 동참하는 시주금의

과다(過多)가 우선인 것이다. 수행은 안 해도 좋다.

시주금만 많이 더 많이 내면 된다.

시주금 많이 내면 복(福)많이 받고 더 빨리 성불(成佛)하고 소원성취 하는 것으로 유도(誘導)하고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다.

무(無)보시 천도재가 있단다.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이다.

천도재(遷度齋) 비용(費用)을 받지 않고 재(齋)를 올려준다는 것이다.

아니 요즘도 그런 훌륭한 사찰이 있고 훌륭한 스님이 계신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수단에 불과했다.

더 많은 영가를 유치(誘致)하고 더 많은 불자들을 끌어 모우기

위한 치졸(稚拙)한 권모술수(權謀術數)에 불과했든 것이다.

“법사님! 말도 마세요. 무보시가 어디 있어요?

영가님 속옷 값 내라. 옷 값 내라. 목욕 비 내라. 비누 취약 값 내라.

별별 비용을 다 요구하는데 동참(同參)하고서는 안 낼 수도 없고!

골병만 잔뜩 들고 왔습니다.

무보시라는 유혹(誘惑)에 끌려들어 무(無)보시 천도(遷度)재에 동참했다가 과도한 보시요구에 무참(無慘)한 낭패를 당한 보살님이 다른

사찰 천도재에 참석한 것을 미안해 하드니 보시(布施)금 말이 나오자

처음 미안함도 벗어던지고 열을 내고 있었다.

속담에 나오는 “거지 끼리 자루 찢는 격이다”.

삼천년 만에 그것도 전륜성왕 같은 위대한 성인(聖人)이 탄생할 때

핀다는 우담발화는 시도 때도 없이 피어나고 세계최초, 세계최고,

세계최대의 기상천외의 불사(佛事)는 상상을 초월하고 불교 신비의

기적은 이 땅 대한민국에서 다 이루어진다.

이모두가 중생들에게 베풀어야할 불교가 중생들로부터 받으려고

하는 과오(過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법사님 00사 000 큰스님 잘 알지요?

그 스님이 매화(梅畵)를 잘 그린대요.

그림 한 점에 칠백만원 이상인데 서로 구입하려고 줄을 선대요.

가끔 한 번씩 들리는 어느 퇴직언론인 처사님이 하시는 말씀이다.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스님 붓 잡는 것 한 번도 본인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요? 그 후에 배위겠지요. 뭐

나는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다.

매화그림을 그리는 것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데 그려 보관하고

있든 그림에 낙관(落款)을 찍어 칠백만원이 넘는 거금(巨金)의 보시금(布施金)를 받고 파는 것은 자주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처사님 그게 왜요? 뭐가 어떠하다는 거예요?

나는 궁금증을 못 참고 다그쳐 물어봤다.

“법사님 그것도 몰라요?

무명(無名)작가 시켜 그림 그려오라 해놓고 그 그림에 자기들 낙관

찍어 자기 그림인양 고액(高額)으로 팔아먹는단 말이에요.

그런 것도 모르는 내가 퍽이나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나에게 역정 아닌 역정을 내며 힐금 힐금 바라본다.

“법사님 그런 사람들이 한둘인 줄 알아요?

다녀보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세상입니다.

그게 사기(詐欺)꾼이고 칼만 안들은 강도(强盜)이지 올바른 ?이라

할 수가 있습니까?

처사님이 흥분하고 달려든다. 세상이 썩어도 이렇게 썩었을까?

나는 할 말을 잊고 죄 없는 찻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한 달 전쯤의 일이다. 저녁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나는 도시생활에 바쁜 불자님들을 위하여 밤 11시까지 능엄정사

법당을 개방한다.

그날 법당의 인기척에 나가봤더니 아주 곱게 승복을 차려입은 아주

세련된 보살님한분이 내가있는 관음전 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스님 차(茶) 한잔 대접 받을 수 있을까요?

말솜씨도 세련되어있다.

한눈에 보아도 세련미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나는 세련보살님을 차실로 안내했다.

“스님 49재도 하세요?

사찰에서는 천도재를 많이 받아야 돈이 되지요.

차실(茶室) 자리에 앉기가 바쁘게 세련보살님이 말을 걸어온다.

“보살님 저는 스님이 아니고 재가(在家) 법사입니다.

그리고 천도재는 형편대로 합니다.

꼭 재(齋)를 많이 올리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보기보다 성질이 급하시다. 내말이 끝나기도 전에 물어온다.

“아하 법사님이시구나. 재(齋)비(費)는 얼마를 받아요?

섭외비(涉外費)는 몇% 인데요?

궁금한 것도 많은 보살님이시다. 도대체가 뭐하시는 보살님이실까?

나도 궁금했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들을 꺼내 들기 때문이다.

“보살님 섭외비가 무엇인데요? 궁금한 내가 물었다.

“법사님 49재(齋)나 천도재(遷度齋)를 물고 오려면 로비를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로비자금이 몇%냐 이말 입니다.

점점 모를 소리만 물어온다.

도대체 재(齋)올리는데 섭외는 무엇이며 로비는 무엇이며

또 로비자금은 무슨 말인가?

나는 그날 그 세련보살의 설명을 듣고 기절초풍을 할 뻔했다.

지나가는 귀신이 통곡할 말을 들었든 것이다.

분노(忿怒)가 극에 달했다. 말 그대로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범죄행위를 귀신을 팔아 천도재란 미명아래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세련보살 말씀은 자기는 천도재 로비설계사란다.

49재나 천도재를 사찰에 물어다주고 수고비 받아 챙기는 사람이란다. 섭외비는 7:3의 비율로 사찰에서 7을 세련보살이 3을 하기로 계약을 했는데 사찰에서 요즘 약속이행이 제대로 안 돼 다른 사찰을 찾고

있는 중이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진짜 그런 사찰 그런 스님이 있을까?

나는 그 세련보살님 보기가 내가 부끄러워타.

“법사님 한번 해보세요. 사찰 키우려면 재(齋)를 많이 쳐야 됩니다.

법사님이 몰라서 그렇지 어지간한 사찰들은 다 그렇게 합니다.

“탁 쟁그랑.........찻잔을 닦는 내손아귀에서 찻잔이 빠져나가 깨어졌다.

나는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내 양귀를 후벼 파내고 싶었다.

“법사님 이것도 인연인데 연락 한번 주세요.

다홍빛으로 굳어가는 내 얼굴을 감지했든지 서둘어서 자리를 뜨며

역시 세련된 말씀을 남긴다. 나는 외면했다. 내다보지도 안았다.

이제야 고백하건대 나는 그날 법사답지 못한 행위를 하고 말았다.

그 세련보살님이 남긴 명함을 종이분쇄기(粉碎機)에 넣어 아예 가루를 만들고 말았다. 지금도 생각조차 하기 싫은 기억이다.

입 밖으로 내 뱉기조차도 두렵고 창피했다.

하지만 정법불교수행을 위하여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이야기 이다.

정말 이렇다면 고쳐야 한다.

머리만 깎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공부가 되어야 한다. 먼저 수행이 되어야 한다.

스님들은 출가하면 은사스님이 머리를 깎아준다.

허지만 요즘은 이발소에서 자기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 행세를 한다.

소위 이발중이다. 최근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불교 종단 아래에서는

이들을 규제할 수가 없다. 아니 이들을 색출(索出)할 수가 없다.

색출할 필요도 없다.

한국에서는 머리만 깎으면 스님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돈만 많으면 큰스님이고 신앙(信仰)의 대상이 된다.

한국에는 손톱으로 아픈 곳을 찍어 눌러만 줘도 온갖 병이 다 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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