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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를 각오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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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3-17 22:49 조회2,0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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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를 각오하며

“웅봉법사 책 출간은 어찌되누?”

특별 법문(法問)차 능엄정사를 찾아주신 목정배 박사님이 이 책의

출간에 관심을 가지시고 나에게 물어 오신 질문이다.

“예 그리하고 있습니다. 준비 중입니다.”

나는 시원한 답변을 못 드리고 머뭇머뭇하고 있었다.

그랬다! 사실 나는 이 책 ‘부엉이 바위에는 부엉이가 없었다.’출간을

앞두고 한참을 망설이고 장고(長考)에 장고(長考)를 거듭하고 있었다.

원고를 한참을 쓰다가 중단하고 거의 다 썼다가는 마무리단계에서

지워버리고 별별 짓을 다하고 있었다. 그만큼 힘들고 어려웠다.

원고를 쓰기로 작심(作心)한 시점은 고(故)노무현 전직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바로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원고를 쓰려고

노트북의 자판을 치고 들어가면 갈수록 어렵고 망설임만 더해갔다.

정치권의 비화(秘話)를 거론하기가 너무나도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기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대한불교법사회 정론지 ‘법수레’ 2009년 6월호의 책표지를

보고 책을 쓰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확고한 신념이 생겼든 것이다.

‘법수레’ 6월호의 권두언(卷頭言)으로 목정배박사님이 직접집필하신

사자후(獅子吼)를 읽고 나서는 출판할 책의내용에 대한 고민도 일시에 싹 떨어내고 나름대로 확실한 가닥을 잡을 수가 있었다.

역대정권을 들락거려가며 정치권을 들쑤셔가며 청와대를 들먹거려가며

종교계를 저울질해가며 언론을 규탄해가며 단숨에 써내려갔다.

내친김에 목정배 박사님께 말씀드려 박사님이 직접 작품하신 문제의

‘법수레’ 6월호의 책표지를 박사님께 간청 드려 나의책표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큰 자비의 은혜도 받아냈다.

뿐만 아니다. 권두언으로 박사님이 직접집필하신 사자후(獅子吼)의

헌시(獻詩)마저도 사용할 수 있는 영광까지 갖추었다.

그땐 출판만 하면 되게끔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었다.

출판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판 시기는 형편상 다소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나 웅봉법사는 1년에 불교에 관한 서적을 1권씩 집필하기로

부처님께 서원을 올렸다.

08년의 ‘푼수법사 분수보살’ 09년의 ‘와! 귀신이다’

10년의 ‘응? 이렇게 깊은 뜻이!’ 로를 저술하며 부처남과의

서원을 지키며 저서를 통한 수행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서원에 밀려 출판을 2010년 4월 10일에 출판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마저도 지키지 못했다. 시국이 어수선했기 때문이다.

대한불교조계종집행부와 봉은사주지 명진 스님과의 이전투구(泥田鬪狗)식의 다툼이 어째 좀 꺼림칙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누가 바른말을 하고 누가 거짓말을 하느냐?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가 문제가 아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느냐? 가 중요한 것이다.

다툼의 당사자들이 부르짖는 소위 ‘소통(疏通)과 화합(和合)’의

부재(不在)가 문제인 것이다. 자기들과 생각이 다르면 좌파 빨갱이가

되고 자기들과 뜻이 조금 다르면 우파 꼴통분자가 되는 세상이다.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나의 저서 ‘부엉이 바위에는 부엉이가 없었다.’ 읽고 고(故)노무현 전직 대통령에 관한 글을 썼다고 해서 나를 좌파 빨갱이로 매도할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국민운동인 새마을운동을 했다. 고해서 관변단체

운운하며 우파 꼴통분자로 매도할 독자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출판을 망설이고 있었다.

천하(天下)의 대장부(大丈夫) 노무현도 다 죽는데!

나는 좌파 빨갱이도 아니고 우파 꼴통도 아니다.

나름대로 중생을 구제(救濟)하고 나름대로 기도에 최선을 다하는

실천하는 종교인이고 생활하는 수행자일 뿐이다.

바른말을 통하여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전달하여 우리사회의

가치관을 바로세우고 불국정토를 발원하는 재가법사일 뿐이다.

나 웅봉법사 저서 제4집 ‘부엉이 바위에는 부엉이가 없었다.’라는

제목을 보고 많은 지인(知人)들이 걱정을 보내온다.

“권 법사님! 가족들을 생각하세요!

김재동이 보고 윤도현이 보고 명진 스님보고 누구누구보고

누구누구도...........................................................보세요.”

겁을 줘도 너무 많이 준다. 그래서 나는 출판을 망설였다.

그래도 불교법사로서 진실을 알리는 사회의 정의목탁이 되어야 한다.

부처님께서 주신 정법의 가르침으로 무명의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

그것이 불교 법사(法師)가 가야할 올바른 전법(傳法)의 길인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피해를 당할지도 모르는 내 가족 내 지인(知人)들의

행복추구권(幸福追求權)도 보호해야 한다. 그래서 출판을 망설였다.

“웅봉법사 책 출간은 어찌되누?” 박사님의 관심어린 이 한 말씀이

‘임제의 할’이 되고 ‘덕산의 방’이 되어 나를 확! 깨우쳐주고 있었다.

나는 머뭇머뭇하면서도 마음속으로 출판의 불길을 지피고 있었다.

‘한사람의 지옥중생이 있어도 성불(成佛)을 뒤로 미루겠다.’라는

대원본존 지장보살님의 구구절절한 심정으로 나는 출판을 서둘렀다.

내가 쓴 이 한권의 책으로 인하여 단 한사람이라도 종교를 바로보고

불교를 바로알고 국가를 바로세우고 사회를 바로 이해한다면

나는 무간지옥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책을 출판하겠노라고

담 대(膽大:간 큰)한 발심(發心)을 하고 출판을 서둘기로 했다.

그리곤 서둘러 원고정리에 들어갔다. 새로 원고를 쓰다시피 했다.

기존의 작성된 원고에서 소통(疏通)과 화합(和合)을 저해(沮害)하는

내용은 가급적(可及的) 삭제를 가했다.

이 책에서는 내가 경험한 사례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

내가 경험이 부족한 정보는 인터넷 정보를 주로 이용했는데

혹시라도 선의(善意)의 피해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어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 심사숙고(深思熟考)했음도 밝혀두고자 한다.

이 책에서는 한때 시중에 회자(膾炙)되었든 소문(所聞)들을 활용하고 있는데 가능하면 객관적이고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내용만을 언급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될 수 있으면 실명(實名)사용을 자제했다.

그러나 연예인을 비롯한 공인(公人)으로 인정되는 분들의 이름은 실명(實名)으로 거론(擧論)하기도 했다.

실명(實名)이 사용된 분들에게 죄송합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또 가능하면 논픽션(non fiction)으로 쓰려고 하였으나 부엉이바위

마애불(磨崖佛)과 당나라측천무후 부분은 전해오는 전설(傳說)을

토대로 한 픽션(fiction)임도 밝혀두고자 한다.

“법사님! 우린 언제 원본(原本)을 한번 보여주세요.”

애써 썼든 원고를 파괴하는 것을 지켜본 보살님이 하시는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쓴 책을 재미있게 읽어주신 보살님들인데

내가 원본을 파쇄 하는 것을 보고 자기들이 더 아쉬워한다.

“보살님! 원본이 어디 있습니까? 제다 파쇄(破碎)해 버렸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솔직히 내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글 쓰는 사람이 원고를 얼마나 애지중지(愛之重之)하는데!

나 같은 아마추어는 1년에 책 한권 겨우 쓰는데!

그래도 타협점을 찾아야한다. 나 혼자만이라도 고집(固執)과

아집(我執)을 꺾고 소통과 화합의 길을 선택하고 개척해야 할 것이다.

우리한국 사회는 오랜 세월을 단순(單純)흑백(黑白)논리로 살아왔다.

그러나 경제발전과 세계화를 통한 서구(西歐)문물의 유입(流入)등으로

복잡(複雜)다양(多樣)의 문화와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문화가 바뀌고

시대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것이 하나있다.

바로 이분법적(二分法的)흑백논리(黑白論理) 그것이다.

대통령이 좌빨(좌파(左派) 빨갱이)이라고 몰아내라 했을까?

대통령이 우꼴(우파(右派) 꼴통)이라고 매도하고 저주하라 했을까?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소위 힘센 자들이, 소위 가진 자들이, 소위 배운 자들이 더 많이 갖고 더 큰 힘을 갖기 위하여 정권에 알랑거리며 아부하는 짓이다.

소위 약자들이, 소위 가난한자들이, 소위 못 배운 자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정권에 저항하는 피해의식의 몸부림이다.

왜? 좀 더 베풀지 못할까? 왜? 좀 더 양보하지 못할까?

왜? 좀 더 인내하지 못하고 서두르고 조급해 할까?

법(法)집행(執行)이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法)이란 무엇인가? 법이란 진리를 말한다.

올바르지 못하면 진리가 아니다.

‘귀의법(歸依法)이욕존(離慾尊)’

부처님께 올리는 삼귀의례(三歸儀禮) 중 하나의 게송(偈頌)이다.

욕망을 떠난 법(法:진리)이 올바른 진리(眞理:법)인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욕망을 떠난 중도의 길을 가고자 최선을 다했다. 중용(中庸)의 도(道)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 책을 출판하는 서원이다.

나는 이 책을 저술하면서 새삼 선지식의 영향력을 실감(實感)했다.

미천 목정배 박사님! 대한민국최고의 선지식!

박사님의 세계관은 호(好)도 없고 불호(不好)도 없다.

오직 선입견(先入見)이 배제된 중도의 길을 걸어가시고 있는 것이다.

박사님의 중도는 두루뭉술한 어중 잽이 중도(中道)가 아니다.

흐리멍덩한 멍텅구리 중도(中道)는 더더욱 아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를 확실하게 가리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날카롭고 따뜻한 지혜의 중도(中道)이다.

나는 오늘도 박사님의 넓고 높은 그늘아래서 새로운 중도의 지혜를

닦고 만들고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실천하며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길은 법사다운 법사가 대(大)법사(法師)되어가는 것이다.

그 길만이 박사님의 가르침에 보답하는 중도(中道)의 길이다.

박사님! 감사합니다. 이 책‘부엉이 바위에는 부엉이가 없었다.’

출판인연 공덕을 박사님께 올립니다. 대한민국 국민들께 회향합니다.

참! 박사님 왕따는 안 당하겠지 예? 갑갑해서? 여쭈어봅니다.


불기 2554년 경인년 음력4월 초8일 부처님오신 날

능엄정사 관음전에서 새벽에 쓰다.


능엄정사 대표법사 웅봉 권재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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